맹자는 세상사람들이 두루 우러러 받드는 인물의 조건으로 관작과
연치와 덕을 꼽았다.

그래서 관작이 높거나,나이가 많거나,덕을 지닌 사람을 "달존"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 세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은 드물다는 생각에서 덕다음에
나이,그 다음에 관작순으로 가치의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러니 덕이 있는데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라면 관작이 높은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달존"이 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달존"으로 높여 대우한 것은 조선왕조가 으뜸이
아니었나 싶다.

"장유의 차서"는 오륜의 하나로 강조돼 나이가 자신의 배가 되면
어버이처럼,열살이 위면 형처럼,섬겼고 다섯살 위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서 걸었다.

임금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먼저 황발(70~80세의 노인)에게 지혜를
물었고 인사에서도 연공서열이 무엇보다 중시됐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날에는 70세가 넘어서까지 현직에서
일한 조정관리가 흔치는 않았다.

또 70세 가까워지면 물러나기를 자청해 쉬는 것이 불문률처럼 돼
있었다.

조정에서 "70세정년론"이 처음 공식적으로 논의된 것은 세종5년(1440)이었
는데,조사는 70세를 정년으로 하되 사직을 자청하기를 기다려 해직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로부터 3년뒤에는 70세가 되면 무조건 산직에 편입시키자는 건의도
있었으나 논란이 일어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문종때 이르러 70세가
돼 사직을 자청하는 자에게 자금을 올려주고 명예퇴직을 시키는
방법을 택해 시행했다.

그러나 명망이 높고 정력이 쇠하지 않아 일을 맡길만한 사람은
임금의 특명으로 70세가 넘어도 그대로 현직에 머물었다.

예를들어 세종때의 명재상 황희는 14세에 출사,재상만 24년을 지내다가
86세에 은퇴해 90세에 세상을 떠났고,성종때의 정창손은 30년의
공직생활중 11년을 영의정직에 있다가 84세에 은퇴한뒤 86세에 죽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조회에 나와 이리저리 넘어지는
그를 비난하는 젊은 사관의 기록은 당시에도 세대간의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승의 일각에서 "70세정치정년제"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그것이 개혁을 내세워 자기의 평안함과 온전함을 도모하려는 "자전지계"에
그쳐 오히려 "통합의 정치"를 깨뜨리는 일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