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반포4동 미도 아파트 골목길. 큰 길을 가운데 두고
갖가지 음식점들이 마주 보고 있는 이 곳에 "신도"라는 한우고기집이
있다.

소 한마리에서 기껏해야 몇백 그램 얻을 수 있는"특별부위"를 비롯,꼬리곰탕
오리탕등을 주 메뉴로 취급하는 이 집 문을 여는 손님들의 눈길은
계산대 뒤편에 가 멎는다.

여기에는 1천원권,5천원권,1만원권,중국인민은행이 발행한 일백원권,홍콩
달러,엔화,이탈리아 리라화폐등 각종 지폐가 마치 부적처럼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복돈""차비없을 때 빌려 주는 돈"아니면"손님들이 잃어 버린 돈"들을
붙여 놓은 것일까.

이같은 의구심은 지폐옆에 붙어있는 조그만한 메모지를 보고서야
풀린다.

"무의탁 정박아들의 기금입니다.감사합니다. (신도가족)".

미담의 주인공은 주인 소정자씨.(49.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231-24).

92년 허허벌판이었던 이 골목에 새 도시를 건설한다는 "원대한 취지"에서
"신도"로 이름 짓고 영업을 시작한 소씨는 지난해 어느 손님으로부터 생전
처음"팁"을 받는다.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어요.주머니에 넣을 수도 금고에 넣을 수도
없었어요.그래서 기념 삼아 벽에 붙이게 됐죠.그리고이 돈이 모이면 좋은
일에 써보자는 생각까지 해보게 됐어요"

소씨의 "사랑의 벽면 모금함"에는 매달 7~8만원의 성금이 모인다.

그리고 그 돈은 무의탁 정박아 보호소인 강남사회복지재단과 소씨와
자녀들을 신양생활로 이끈 조 안셀모수녀가 불광동 연신내 산꼭대기에서
무의탁 할머니들을 모시고 있는 "성우회"로 보내진다.

돈만 기부하는 것이 아니다.

"성우회"의 경우에는 매달 한 번씩 할머니들이 좋아하는 사골,과일,떡,두부
등을 사들고 그들을 위로한다.

지난달에는 혼잡한 연말연시를 피해 동지전날인 12월21일에 할머니들을
찾아 뵈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힘 닿는 대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제 삶의 의미입니다."

"동병상련"의 감정은 소씨의 순탄치 않았던 삶에서 나온다.

두개골까지 파열됐던 큰사고를 포함 4번의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목과 왼쪽다리는 큰 불편을 겪고 있다.

게다가 85년 큰 마음먹고 삼각지에다차린 민속음식점은 소방차 10대가
동원되는 대형 화재로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하고 "화마"에게 빼앗겨
버렸다.

"교통사고로 제가 죽었다면 저희 애들도 소년소녀 가장이 됐을 겁니다.
화재가 났을 때는 학비는 커녕 쌀도 제대로 사 먹을 수 없는 처지에서
안전관리소홀로 입건까지 됐습니다.연판장을 만들어 탄원운동을 해주고
생활비를 보태준 당시 이웃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소씨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가득 담겨있었다.

소씨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지극히 낙관적이다.

그는 "세상엔 좋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빛이 안나고 가끔 생기는
끔찍한 일들만 부각될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씨의 직업은 음식점 주인이다.

손님들이 고기,김치 모두 맛있다고 칭찬할 때는 하늘로 날아 갈 듯하지만
"이거 한우 맞아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깨에 힘이 쭉 빠지고 만다.

또 "단골 손님들의 입맛을 잘 알기때문에예약만 하면 알아서 준비해
줍니다"라고 투철한 직업의식을 뽐내기도 한다.

소씨와 한 가족처럼 지내는 6명의 "신도인"들은 올 설 제주도 단체여행을
갈 꿈에 힘든 줄도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