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작전사령관인 야마가타는 사이고가 가고시마로 돌아가 시로야마에
진을 쳤다는 것을 알자 군사를 이끌고 물밑듯 가고시가로 진입했다.

그리고 시로야마를 포위하였다.

12개 연단 2만의 병력이었다.

3백여명을 마지막으로 해치기 위해 2만여명이나 되는 군사가 산을 에워싼
것이었다.

70대 1인 셈이니 상대가 될 턱이 만무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아침에 깨끗이 쓸어 버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공격을 유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부녀자들이 시로야마로 드나드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출입은 절대로 금했으나 부녀자들이 음식이나 술 혹은 의복
따위를 나르는 것은 묵인 하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사이고에 대한 야마가타의 마지막 선심인 셈이었다.

고향에 돌아왔으니 얼마동안 이나마 푹 좀 쉬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 지켜보려는 속셈이기도
하였다.

보름이 넘도록 공격을 유보하고 있던 야마가타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휴전상태를 지속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소탕작적을 전개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날을 9월24일로 정했다.

그런데 그 하루 전인 23일 아침나절에 참모장인 해군대보 가와무라가
야마가타를 찾아왔다.

"내일 예정대로 총공격을 감행하실 작정입니까?"

"그렇소 차질이 없도록 준비해 주기 바라요"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사이고 진영에서 사람이 찾아 왔지
뭡니까.

사이고를 죽이는 것은 국가의 큰 손실이니 자기네 마지막 남은 군사가
모조리 할복 자결을 해서 반군의 죄과를 받을 테니까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이고의 목숨만은 구해줄 수 없느냐고 울면서 호소를 하더라니까요"

"음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국가에 공로가 있든 없든 반란을 일으켜 정부에 대항한 반역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고 나무랬지요.

만약 사이고가 목숨이 아까우면 직접 제발로 우리 본영을 찾아와 용서를
빌어야 할게 아니냐고 했어요"

"그자들이 돌아갔나요?"

"아니요. 사령관님과 상의를 해보고 확실한 대답을 할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다음 야마가타는 말했다.

"내가 사이고에게 편지를 쓰겠소. 그걸 그자들에게 주어서 보내도록
하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