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6년 여름,30세 남짓한 남루한 옷차림의 한 독일 청년이 은행장을
설득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토머스 키르흐로 지방대학의 경영조교수로 일하고 있는
사람.그는 무슨일이 있어도 5만 4천달러를 빌려야겠다는 의지로 물러설줄
몰랐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탈리아의 펠리니감독이 만든 영화 "길"의 공급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영화 전문공급업자들도 비싼 외국영화에는 감히 손을 뻗치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다.

반응이 신통치 않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황당해하는 은행장에게 그는 다가오는 매스미디어시대의 모습을
펼쳐보였다.

새로운 시대에는 엄청난 양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시키기위해
열성적으로 설명을 해댔다.

그의 열성과 논리에 감복한 은행장은 마침내 넘어가고 말았다.

오늘날 독일의 신문 방송 잡지등 대중매체를 한손에 주무르는
토머스 키르흐 언론재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영상에 목말라하고 있던 독일인들에게 "길"은 마치 오아시스같은
힘을 발휘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엄청난 인기와 돈을 거머쥐었다.

학교를 박차고 나와 본격적으로 "외화장사"에 나섰다.

미국영화의 인기를 예견한 그는 미제작업자들과 10년단위의 "패키지협상"
타결에 나섰다.

타공급업자들의 추월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워너 브라더스,파라마운트를 비롯 거의 모든 미영화사들과 손을 잡았다.

극장과 더불어 TV시대가 개막되고 한발앞서 출발한 그는 선두자리를
고수했다.

미영화공급권의 선점은 방송계에서 그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0년대 중반,불혹의 나이를 막 넘어선 그는 이미 독일 언론계의 "별"이
되어있었다.

독일언론의 점령을 목표로 삼은 키르흐회장은 땅다지기에 들어갔다.

두가지 전략을 짰다.

첫째는 친분관계를 쌓는 것이었다.

정.재계인사들과 부드럽지만 질긴 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대중매체시대의 도래를 내다본 그의 선견지명은 사람을 알아보는데도
예외는 아니었다.

헬무트 콜 독일총리,오토 바이스하임 철도재벌등 정.재계의 거물들은
출세하기 전부터 그와 친분을 다지기 시작했다.

후에 과다한 방송지분이 문제가 되었을때 지인관계를 넘어서 "친구"가
돼버린 그들은 음양으로 그를 도왔다.

"사업은 사람장사"라는 그의 지론은 큰 힘을 발휘했다.

두번째전략은 방송사 지분을 차례로 사들이는 것이었다.

다행히 독일은 방송사간의 상호출자를 허용했다.

문제는 개인이 방송사의 지분 50%이상을 취득할 수없다는 법률이었다.

사업확장에 재미를 들인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녀등의 이름으로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95년 현재 토머스 키르흐회장은 연매출 20억달러의 "키르흐그룹"주인이다.

그룹산하에는 5개의 TV네트워크,십수개의 신문과 잡지가 있다.

미포브스지 최근호는 그의 개인자산을 35억달러로 평가했다.

고희를 눈앞에 둔 키르흐회장은 당뇨로 인한 심한 시력저하에도 불구,
아직도 업무처리에 쉴새가 없다.

"나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기자회견에서 "회장의 뒤를 이을
언론재벌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 염정혜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