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슈 도노, 어서 피하셔야겠습니다"

"어디로 피한단 말이오? 안전한 데가 어디 있소?"

"그래도 여기는 안되겠습니다. 저렇게 몰려오지 않습니까. 일어서세요"

"음-"

벳푸가 부축하여 일으키는 바람에 사이고는 마지 못하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에게 이끌리듯 동굴 밖으로 나갔다.

쿵! 쿠쿵! 쿠쿵! ... 포성이 울리고,팡! 파팡! 탕탕탕 탕탕탕. 총성이
온통 시로야마를 뒤흔들어대는 가운데 저쪽 산등성이로부터 정부군이
계곡을 향해 까맣게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사이고의 마지막 군사들은 총탄이 다하여 대검을 빼들고 최후의
백병전을 감행하려고 여기 저기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피융 피융- 총알이 날아오는 속을 사이고는 벳푸와 함께 계곡 아래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계곡을 빠져나가면 큰길이 나서는데,사이고는 그 쪽으로 가려고 했다.

"안됩니다. 난슈 도노, 이 쪽으로 가셔야지요"

벳푸가 방향을 산허리의 우거진 숲속으로 돌리려고 했다.

"아니오.죽어도 큰길에 나가서 죽고 싶소"

"죽다니요. 어서 저 숲속에 들어가 숨읍시다" 그때였다.

"으윽-"

사이고의 뚱뚱한 몸뚱이가 휘청하면서 풀썩 꺾이듯 무너졌다.

"난슈 도노!"

벳푸가 재빨리 달려들어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이제 안되겠소. 총알이 몸에. 아-"

이빠디를 악물며 사이고는 있는 힘을 다해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정신을 좀 가다듬더니 동북쪽을 향해 고쳐 앉았다.

도쿄가 있는 방향이 가고시마에서 동북쪽이었던 것이다.

사이고는 덥석 두 손을 땅바닥에 짚으며 깊이 머리를 숙였다.

멀리 도쿄에 있는 메이지 천황에게 마지막 배례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벳푸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를 도와주오. 잘 갈수 있도록."

"아- 난슈 도노"

벳푸의 입에서 곧 울음이 쏟아질듯 했다.

"어서 부탁하오"

"예.으흐흐흐."

"음- 허망하구려"

사이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쑥 잡아 뽑았다.

동시에 벳푸도 대검을 칼집에서 뽑아 번쩍 쳐들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