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 재일 인권운동가 최창화목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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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재일 한국인의 인권 향상 등을 위해 일본 정부의 지문 날인 철폐
운동에 앞장 섰던 최창화목사(재일 대한기독교소창교회)가 8일 오전
11시34분 폐암으로 북구주시의 오구라기념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64세.
지난 54년 일본에 온 최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를 졸업한후 오구라 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며 지난 80년 일본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외국인
등록증의 지문 날인을 "재일 한국인에 대한 상징적 차별"이라고 규정, 이를
거부하는 등 80년대에 활발하게 일어 났던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최목사는 특히 "한국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는 것은 중대한 인권의
침해 "라며 일본의 NHK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일본 최고 재판소로부터
한국인의 씨명 호칭을 한국어 발음으로 읽는 것이 옳다는 씨명 호칭의
인격권을 처음으로 인정 받기도 했다.
최목사는 평북 선천군 출신으로 자택은 북구주시 소창북구 백은 1-6-7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9일자).
운동에 앞장 섰던 최창화목사(재일 대한기독교소창교회)가 8일 오전
11시34분 폐암으로 북구주시의 오구라기념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64세.
지난 54년 일본에 온 최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를 졸업한후 오구라 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며 지난 80년 일본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외국인
등록증의 지문 날인을 "재일 한국인에 대한 상징적 차별"이라고 규정, 이를
거부하는 등 80년대에 활발하게 일어 났던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최목사는 특히 "한국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는 것은 중대한 인권의
침해 "라며 일본의 NHK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일본 최고 재판소로부터
한국인의 씨명 호칭을 한국어 발음으로 읽는 것이 옳다는 씨명 호칭의
인격권을 처음으로 인정 받기도 했다.
최목사는 평북 선천군 출신으로 자택은 북구주시 소창북구 백은 1-6-7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