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해외이전이나 현지법인 설립, 그리고 외국 유수기업에 대한 자본참여
내지 매수.합병(M&A)-.

요즘 신문 지면에는 이런 류의 기사가 하루에도 몇건씩 올라간다.

작년 한햇동안 "국내기업의 해외투자가 총 1,917건이었고 금액으로도
35억2,500만달러나 됐다"(재정경제원)니 그럴만도 하다.

건수.금액 모두 전년의 배가까운 실적이다.

하루 평균으로 따지면 5~6개 기업이 해외로 빠져나간 셈이다.

국내기업의 이같은 해외러시 현상을 후세 경제사가들은 어떻게 표현할까.

아마도 "20세기말 한국주식회사들의 한국대탈출작전"이라고 써놓을지도
모른다.

산업면을 맡고 있는 데스크의 입장에서 보면 하등 나쁠게 없다.

오히려 반길만한 현상이다.

우리 기업의 세계화가 이 정도로 급피치를 올리고 있구나 싶어 덩달아
신이 날 때도 있다.

그러나 걱정도 많다.

국내 산업공동화에 대한 우려도 그렇지만 그토록 많은 돈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는 점이 무엇보다도 궁금하다.

혹자는 최근 1~2년새 기업들이 "떼돈"을 벌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작년 상반기 국내 제조업체들의 경상이익이 53%나 증가(한은 기업경영
분석)했고 하반기에도 높은 증가세가 이어져 그만큼 해외투자 여력이
생겼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삼성그룹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중심으로 벌어들인 "떼돈"(세후.배당후 이익잉여금
9,000억원)으로 사업을 왕성하게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가 않다.

그럴 수도 없다.

반도체에서 번 돈을 타부문에 쏟아넣기란 구조적으로 매우 어렵게 돼 있다.

산업의 특성상 이익이 나더라도 쓸 곳이 더 많다.

대형 선행투자가 안될 경우 반도체산업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른바
"타이밍 산업"이다.

그래서 자금수지상 적자사업(cash flow negative operation)이란 말도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매년 1조원 안팎의 돈을 들여 반도체라인을 개체하고
있다.

올해는 2조원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투자액이 더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삼성전자의 이익잉여금은 그룹의 사업확장에 쓰이기는 커녕 자체
반도체 투자에도 태부족임을 알수 있다.

재무제표를 봐도 그렇다.

이 회사는 지난 5년간 차입금 규모가 2.6배나 늘어나 94년말 현재 3조
6,000억원에 이르고 있다.

금리부담은 2.4배인 3,100억원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그 부담은 아주 쉽게 흡수됐다.

매출이 더 큰 폭으로 2.9배(11조5,000억원)나 늘어나 매출액대비 금융비용
부담률이 3.3%에서 2.9%로 낮아진 덕분이다.

반도체사업이 아니더라도 국내기업들은 그동안 장사가 잘됐다.

그 결과 차입능력이 향상돼 국내외에서 많은 자금을 조달했고, 그런 자금을
밑천으로 해외기업을 사들이는등 투자 확대에 나서고 있다.

"선순환"을 만끽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선순환이 언제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한계도 분명히 있다.

요즘 증권시장이 눈에 띄게 비실대고 있는 것도 한계 조짐의 하나일 수
있다.

국내기업들은 지난해 유상증자 전환사채(CB)발행등을 통해 8조원 정도의
돈을 끌어다 썼으나 자칫 잘못하다간 이같은 싼 값의 자금조달이 벽에
부딪칠 수 있다.

여기에다 혹시 경기라도 뒤뚱거리면 기업은 매출이 줄고 선순환은 갑자기
"자기파괴"에 들어갈게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한국기업의 해외러시 현상은 세계화 구호에 편승해 버블만
일게 하는것 아니냐는 의심도 가질만 하다.

물론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은 주가나 땅값 상승등을 노리고 하는 재무지향형
(financial) M&A와는 다른 것 같다.

부품조달이나 시장확보 차원에서 이뤄지는 전략적(strategic )M&A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걱정되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기업이 과연 해외사업에 대해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고 해외에
나가는지, 경영의 현지화등 투자기업에 대한 글로벌경영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되기 때문이다.

때마침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도 최근 "한국기업의 유럽상륙 대도박"이란
기사에서 역시 이 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일본기업들은 필요한 정보의 80%이상을 수집해 놓고도 신중을 기하는
반면 한국기업들은 겨우 20%의 정보를 갖고 달려든다"는 것이다.

좀 폄하하면 한국 기업들의 해외사업은 "그저 밖으로 나가야 한다니까,
남들이 나간다니까 일렬종대로 따라가 보자"는 식이 아닌가 싶다.

빨간 불이 켜져도 다함께 건너면 두렵지 않다는 "기업심리"가 깔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같은 세계화는 거품만 일게 할 뿐이다.

80년대말 선순환을 만끽하다 90년대초 버블이 꺼지면서 고전을 면치못했던
일본 기업들이 생각나서 하는 얘기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