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 "화국문장"이란 말이 있다.

"나라를 빛내준 문장"이란 뜻인데 그런 글을 지은 문사를 "국문화"(나라의
꽃)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라가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데는 강수라는 문사의 외교문서작성
이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문무왕이 밝히고 있고 고려때 요나라와의 국경
분쟁에서는 박인양의 "진정표"가 요제를 감동시켜 화를 면할수 있었다.

또 조선조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가 "경박하고 버릇이 없다"고 책을 잡혀
조선사신이 명나라에 잡혀 있을때도 압송돼간 권근의 시가 황제를 감복시켜
사건이 무마됐다.

바로 그런 것들이 "화국문장"이었고 그런 들을 쓴 외교관들이 "국문화"
였다.

그러나 조선의 성종대에 와서 문장을 짓는 일이 선비의 말기로 취급되기
시작하자 성종은 외교문서작성이나 명나라 사신의 시에 화답할 능력있는
외교관을 키우기에 심혈을 기울인다.

정기적인 과거외에도 일년에 대여섯 차례씩 2품이하의 문신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쳐 재사를 가려내고 그들을 독려했다.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는 명사를 접대하는 조선관리가 학문과 문장으로
그들을 압도해야만 용이하게 풀렸다.

결국 실력을 길러 조선의 문화적 자긍심을 제고시키는 외교관양성이
성종의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76년 명사 기순이 왔을때 서거정의 화답시를 보고 "선생은 중국문사들
사이에 끼더라도 4~5명안에 들것이다"라고 탄복했거나, "시경"과 백락천의
시를 마음대로 구사하는 성종의 학문에 놀라 "호학의 군주"라고 칭송했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의 임금이나 신하들의 문화적 긍지를 지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의 결과를 읽을수 있다.

성종재위 26년동안 명에서는 7회 조선은 95회나 사신이 오가면서도 별탈
없이 외교관계를 유지해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도 모두 유능한 외교관의
활약이 컸기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런식의 문화외교가 자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정부가 세계화를 실천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하나로 문화외교를 강화하기로
했다고 한다.

전시회 공연 외국박물관내 한국실확충, 학술회의등 한국문화소개사업도
지속돼야 하겠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정 문화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외교관양성이 필수적이다.

이제는 옛날처럼 글만 잘 지어서는 안되고 문화와 예술전반의 전문가인
"국지화"들의 활약이 기대되는 시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