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열두 곡 노래가 드디어 끝났다.

서곡과 맺음곡까지 합하면 무려 열네 곡이나 되는 셈이었다.

경환선녀는 가보옥에게 부곡까지 마저 들려주려다가, 보옥이 그
노래들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을 눈치채고는 속으로 탄식을
하였다.

"어리석은 아이로구나.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다니" 보옥은 노래를
그만 부르라고 가희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황홀해져 마치 술에 취한 것과 같이
되었다.

"나를 좀 눕게 해주세요" 보옥의 몸이 스르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얘들아, 방을 치우고 이 분을 모시도록 하여라" 경환 선녀가 시녀
들에게 명령하였다.

보옥이 어느 방으로 인도되어 들어가니 한번도 보지 못한 진귀한
물건들이 여기 저기 가득 놓여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웬 여인이 하나 방안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인의 곱고 아리따운 자태는 어찌 보면 설보채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임대옥(임대옥)을 닮음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서 보옥은 방에 몸을 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경환 선녀가 방으로 들어와 설명을
해주었다.

"저 아이는 가경이라고 하는 제 동생이에요.

어릴적 이름은 겸미였죠.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고,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던 거지요.

저 아이를 당신의 아내로 드리겠어요.

오늘 밤이 합궁하기에 좋은 날이니 지체하지 말고 저 아이를
가지세요"

보옥은 더욱 얼떨떨해져 자초지종을 캐어묻지 않을수 없었다.

"갑자기 여자와 잠자리를 하라니요?저는 지금껏 한번도 여자와 자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여자를 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지도 모른다구요.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것을 강요하는 거죠?" 경환 선녀가 슬며시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오늘 영국부에 볼일이 있어 거기로 가는 도중에 녕국부 앞을 지나
다가 녕국공과 영국공 두분의 혼령을 만났지요"

"영국공이라면 저의 증조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아닙니까.

녕국공은 큰증조 할아버지가 되시고요" 보옥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반문하였다.

"그렇지요.

그 두분께서 나에게 특별하고 기이한 부탁을 하셨지요"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