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유학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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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이웃인 중국을 비롯하여 멀리 인도에까지 유학을
갔다.
최초의 공식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영류와 5년(622)도에 나오는
도당유학생이다.
640년에는 당나라가 최고학부인 국학을 인접국가의 유학생들에게 개방
하면서 고루려 백제 신라의 많은 학생들 국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특히 신라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하고자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을 관비유학생으로 파견하여 수학케 했다.
안승복의 "원사강목"에는 신라의 당나라 유학생이 많을 때는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당나라가 9세기초부터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빈공과)에 합격한
신라 유학생이 무려 58명이나 되었다.
최초 합격자였던 김운경을 비롯 김가기 최치원 최승우 최인원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신라 스님들의 유학열 또한 대단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학승은 116명이나 된다.
천축(인도)까지 간 유학승은 혜초를 비롯 9명이고 중국 유학승은 원광
자장 의상 원측등 107명이다.
선종구산의 창시자 대부분이 이들 가운데서 나왔다.
그러한 유학열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최광정을 비롯 송나라와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유학생이 32명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때에 명나라에 김도를 파견한 것을 끝으로
7세기 이상 계속된 해외유학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뒤 1876년(고종13)의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을 계기로 거의 4세기만에
해외유학이 재개되었다.
1880년 청나라의 병기제조항에 38명을 파견한데 이어 일본의 게이오의숙을
비롯한 학교들에 많은 학생들이 보내졌고 서재필 유길준등은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1910년 국권상실 당시 일본유학생은 2,000명 내외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45년 광복은 유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53~71년의 유학생은 세계42개국에 1만355명으로 그중 미국 유학생이 전체의
87.6명을 차지해 구한말과 일제기의 일본중심유학시대에 막을 내렸다.
지금도 미국에 있는 유학생수는 3만여명으로 어느 다른 나라에 나가 있는
유학생보다 숫자면에서는 월등히 많으나 비율만에서는 30%(전체해외유학생
약10만명)를 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가뜩이나 학생난에 허덕이고 있는데라, 다른 나라에 한국유학생을 잠식
당하고 있는 미국이고 보면 한국유학생 시장에 군침이 돌만도 하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미대사관 주관의 유학
박람회가 성황을 이루었다는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해마다 30여만명의 대학입학 탈락자가 생겨나는 한국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일까.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8일자).
갔다.
최초의 공식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영류와 5년(622)도에 나오는
도당유학생이다.
640년에는 당나라가 최고학부인 국학을 인접국가의 유학생들에게 개방
하면서 고루려 백제 신라의 많은 학생들 국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특히 신라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하고자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을 관비유학생으로 파견하여 수학케 했다.
안승복의 "원사강목"에는 신라의 당나라 유학생이 많을 때는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당나라가 9세기초부터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빈공과)에 합격한
신라 유학생이 무려 58명이나 되었다.
최초 합격자였던 김운경을 비롯 김가기 최치원 최승우 최인원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신라 스님들의 유학열 또한 대단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학승은 116명이나 된다.
천축(인도)까지 간 유학승은 혜초를 비롯 9명이고 중국 유학승은 원광
자장 의상 원측등 107명이다.
선종구산의 창시자 대부분이 이들 가운데서 나왔다.
그러한 유학열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최광정을 비롯 송나라와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유학생이 32명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때에 명나라에 김도를 파견한 것을 끝으로
7세기 이상 계속된 해외유학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뒤 1876년(고종13)의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을 계기로 거의 4세기만에
해외유학이 재개되었다.
1880년 청나라의 병기제조항에 38명을 파견한데 이어 일본의 게이오의숙을
비롯한 학교들에 많은 학생들이 보내졌고 서재필 유길준등은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1910년 국권상실 당시 일본유학생은 2,000명 내외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45년 광복은 유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53~71년의 유학생은 세계42개국에 1만355명으로 그중 미국 유학생이 전체의
87.6명을 차지해 구한말과 일제기의 일본중심유학시대에 막을 내렸다.
지금도 미국에 있는 유학생수는 3만여명으로 어느 다른 나라에 나가 있는
유학생보다 숫자면에서는 월등히 많으나 비율만에서는 30%(전체해외유학생
약10만명)를 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가뜩이나 학생난에 허덕이고 있는데라, 다른 나라에 한국유학생을 잠식
당하고 있는 미국이고 보면 한국유학생 시장에 군침이 돌만도 하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미대사관 주관의 유학
박람회가 성황을 이루었다는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해마다 30여만명의 대학입학 탈락자가 생겨나는 한국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일까.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