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박물관이 1935년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장신구 일습을
가져다가 특별전을 연 일이 있다.

특별전을 끝내고 기관장들이 모인 축하연에서 평양박물관장은 차능파라는
기생에게 금관은 물론 귀걸이 팔찌 목걸이 요식까지 모두 착용시켜
술자리의 흥을 돋궜다.

그러나 어느 신문에 이 장면이 사진으로 공개되는 바람에 그는 관장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관장이 저명했던 고고학자 소천현부였다는 사실은 더 놀라운
일이다.

신라 전성기였던 8세기께는 당의 장안,일본의 나량와 함께 동아시아의
국제도시로 부상했던 경주가 시골부락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역사적
중요성을 재인식 받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일본인들의
한반도 진출을 계기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분발굴이나 조사,일부유적보수는 앞서든 사례에서
볼수 있듯 그들이 옛날부터 찬양해오던 신라문화에 대한 호기심에
찬 흥미의 차원을 넘지못했다.

경주가 고대문화에 대한 긍지와 애정으로 보수 보존 개발의 대상이
된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20여년 동안 지속된 문화재발굴보존사업과 개발사업으로
시가지는 깨끗해지고 관광객의 안락과 편의는 증진된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시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고층아파트숲을 보면 경주의
역사성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유적 그 자체도 보수,정화라는 미명아래 너무 새로와 졌다.

경주는 이제 경주같아 보이지 않는다.

경주가 지니고 있는 문화사적 중요성은 천년고도로서의 역사정이다.

자연적으로 낡아진 유적과 유물,자연환경이 있는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

역사도시 경주의 관리는 그런 종합적 역사분위기의 보존이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경주의 개발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정부가 개발의지에
밀려 경부고속철도및 경마장 건설계획을 확정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학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고고학회 한국미술사학회 역사학회등 16개 학회는 18일 세종문화회관에
서 "경주문화재보존"을 주제로 공개세미나를 열어 정부의 계획변경을
요구하고 고도보존법제정,신경주건설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건의내용이 방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서명운동등 계속적인 반대운동도
펴나가겠다는 만만치 않은 기세다.

"정도6백년"의 구호가 무색할만큼 600년의 문화가 사라졌듯이 경주의
유적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고도로서의 경주의 생명은 소멸될 것이다"
정부는 물론이지만 한국인중 문화재에 대한 애착과 긍지가 가장
커야할 경주시민들이 미래를 위해 귀담아 들어야 할 학자들의 호소인듯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