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초 네덜란드 금융그룹인 ING사가 베어링은행의 인수의사를 밝히자
금융중심가인 "시티 오브 런던"은 물론 영국 전산업계가 우울감에 빠져
들었다.

한때 세계최고를 자랑하던 자동차 조선 철강산업등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금융업에 느끼는 애착은 단순한 자부심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롤스로이스등 일부 수제품 고급승용차를 만드는 회사는 몇 있으나
영국국적을 가진 대중용 자동차업계는 전무한 실정이다.

조선업은 한국과 일본과의 경쟁력에 말려 사양산업으로 전락했고 그
본거지였던 북잉글랜드 지역은 삼성 금성 소니 필립스 닛산등 외국업체가
판을 벌이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2백33년의 역사를 지닌 영국최고의 금융업체가 네덜란드에
넘어간다는 사실은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것은 영국금융업도 더이상 과거의 영광을 지키기는
역부족이란 현실이다.

시티 오브 런던의 영광은 이제 미국 일본등 외국자본이 지켜주고 있으며
영국계 은행들은 서서히 막뒤로 물러서는 양상이 완연하다.

모간 그렌펠, 호르 고베트, 필립스 앤드 드루등 한때 영국을 대표하던
금융업체들은 이미 영국국적을 상실했다.

스미스 뉴코트 햄브로스등도 외국기업의 인수합병 대상이 되고 있다.

게다가 영국계 최대 금융업체인 와버그사 마저 베어링은행 파산 직후부터
파트너를 구하는 작업을 재개, 충격을 더해 주고 있다.

지난해말 미국 모건 스탠리사와 합병작업을 펴리다 중도 포기했던 이
은행은 또다시 파트너를 구하기 시작했다.

말이 협력 대상자의 물색이지 세계적인 금융업체에 자신을 팔겠다는
얘기다.

어차피 몸집 키우기 작업을 추진하지 않을 경우 거대한 자본을 가진
다국적은행에 밀려 파산할수 밖에 없다는 현실인식에 따른 자구책인 셈이다.

따라서 이 은행마저 외국계 기업이 인수할 경우 영국국적을 가진 금융업체
는 라자드 브라더스, N M 로스차일드 앤드 손스, 카즈노버등 손가락으로
헤아릴수 있는 정도만 남게 된다.

그렇다면 영국계 금융업체들이 이같은 몰락의 길을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규모의 경쟁에서 약세를 보인데다 경영전략마저 과거식을 탈피하지 못한
결과라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리스크는 크나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남겨주는 파생금융상품을 거래하기
위해서는 지갑이 그만큼 두터워야 생존이 가능하다.

베어링은행도 미시티은행처럼 자금력만 강했으며 그처럼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그렇다고 보수적인 금융거래 방식인 대출이나 부동산투자등에 의존할 경우
인근 프랑스의 국영은행인 크레디 리요네처럼 계속 누적적자에 시달리게
된다.

또 투자은행들은 투자자문에 그치지 않고 정확한 가격결정, 주식과 채권
보유의 적절한 분배 그리고 위험회피 방안등에 대한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금융업도 시대의 흐름에 적극 대응, 새로운 변신을 해야만 살아
남을수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영국계 은행들이 침몰하고 있다고해서 시티 오브 런던도 낙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 스와프물량의 35%를 확보하고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
하는등 그 위세는 여전하나 그 열할을 영국계 은행이 아닌 온건한 노조활동
등으로 경쟁력을 되찾고 있으나 영국기업은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
이다.

산업혁명의 본거지인 영국, 제조능력을 바탕으로 세계금융가에 본산처럼
자부해온 영국은 이제 "영국에서는 영국은행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불명에를
안은채 유럽에서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고 있다.

세계화는 분명 기업의 국적상실, 즉 현지화로 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 국가의 부는 벤츠나 소니와 같은 힘있는 자국기업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영국이 실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