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수 있을까"

"뿌리가 허약한 부실기업에 16개은행이나 걸려들었을까"

지난달 덕산그룹이 부도를 내고 뒤로 나자빠지자 많은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일반인들에겐 단돈 5백만원을 빌려주는 것도 인색한게 은행들이다.

설혹 대출을 해준다고 해도 이른바 "신용조사"를 이 잡듯 한다.

그것도 모자라 믿을 만한 담보를 요구한다.

"혜택" "지원"등의 용어로 잔뜩 생색을 내면서 말이다.

그런 은행들이 14개 시중은행 모두를 포함해 16개나 무더기로 걸려들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은행 사람들은 이를 수긍했다.

여신의 90%이상을 담보로 확보해서가 아니었다.

은행당 1백억원대의 돈을 빌려줘서도 아니었다.

현재의 은행을 둘러싼 여건의 변화를 따져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건 변화란 무엇을 말할까.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근 기업들이 작성하는 "거래은행 선정
기준표"다.

은행들이 자기회사에 얼마나 기여하는 가를 수치로 따져 이를 근거로
순위를 매긴 표를 말한다.

표에 나타난 수치에 비례해 은행거래를 함은 물론이다.

여건변화를 한마디로 말하면 "은행우위의 시대에서 기업우위의 시대로"인
셈이다.

이런 변화는 "일부" 대기업에만 해당하는 현상은 아니다.

괜찮은 기업은 설사 규모가 적은 중견기업이라해도 은행들이 체면불구하고
덤빈다.

수수료가 많이 떨어지는 수출입(외환)거래만 보장해 준다면 돈(대출)
보따리를 싸가지고 다닌다.

예대마진이 줄어들자 마진이 큰 외환수수료를 따내기 위해 은행들이
벌떼처럼 몰려다니는 것이다.

과거엔 은행대출창구가 기업 자금부직원들로 북적거렸지만 이젠 정반대로
은행 섭외요원들이 대기업 자금부창구에서 살다시피한다.

금리결정의 주도권도 은행이 아닌 대기업들이 한다.

성장성 있는 중소기업들의 경우 수틀리면 아예 주거래은행을 바꾸기도
한다.

은행들이 칼자루를 쥐고 자금을 분배하던 시대는 이제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의 얘기가 되버렸다.

"이런 굴욕을 감수하고도 모든 은행들이 죽기살기식으로 달려들 수 밖에
없는게 요즘 은행의 현실"이라는게 은행원들의 하소연일 정도다.

이런 판국이니 부동산담보가 확실한데다 뒷배경이 그럴싸한 덕산그룹에
은행들이 돈을 쏟아 넣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은행들의 위상이 이렇게까지 떨어진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금융자율화와 금리자유화.

여기에 금융의 국제화도 가세한다.

은행들은 과거 만성적인 자금부족시대에서 톡톡히 재미를 봤다.

그러나 금융자율화로 금융기관수가 대거 늘어나면서 이제는 자금의 양보다
질이 중요시되는 시대가 됐다.

금리자유화는 여기에 불을 당겼다.

높은 대출금리와 싼 예금금리로는 장사를 할수 없게 된 것이다.

은행들끼리 서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거래처를 빼앗아 간다.

금융국제화로 외국은행들까지도 경쟁에 한몫 끼어들고 있다.

국내 은행들 입장에선 한마디로 무한 경쟁시대의 도래인 셈이다.

경쟁이 격화되면서 예대금리차는 점점 좁아졌다.

따라서 은행들은 마진을 남기려면 갖은 수를 다 써야 한다.

예금이나 외환거래를 끌어오려면 그만큼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해줘야
한다.

부대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접대란 이제 하는 거지 받은게 아닙니다. 예금이나 외환거래를 끌어오기
위해 10여살이상 차이나는 중소기업의 젊은 자금담당과장들에 까지도 주말
골프접대를 해야 하는 실정이지요"

일선 지점장들의 씁쓸한 고백이다.

은행들이 기업관계에 대해서만 약자로 변한 것은 아니다.

일반 개인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연말부터 불기 시작한 금리파괴전쟁이 이를 말해준다.

은행들은 금리파괴상품을 내놓으면서 여러가지 이유를 들며 고객에 대한
"사은"형식의 상품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 이유일뿐이다.

금리파괴상품을 내놓는 "속내"는 예금이탈을 막기위한 자구책일 뿐이다.

금리파괴상품을 가지고 주판알을 튀겨보면 은행입장에선 잘해야 본전이다.

우선 자금조달코스트가 올라가 손익을 맞추기 힘들다.

금리파괴란 한마디로 예금금리를 올려주고 대출금리를 낮게 가져간다는
것.

그러나 이를 통해선 예대마진을 남기기 힘들다.

일부 은행들의 경우 역마진까지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모은행이 파격적인 금리우대상품을 내놓았다가 자금이 너무 많이 몰리자
서둘러 판매를 중지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게다가 금리파괴상품에 몰리는 자금이 은행밖에서 새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은행내의 다른 계좌에 있던 자금이 파괴상품으로 옮겨지는 단순 "이동"이
많은게 사실이다.

한 은행관계자는 "금리우대상품에 들어오는 예금의 50-60%는 기존의 다른
상품에서 빠져나가는 것일뿐"이라고 말한다.

일부에선 이를 은행들의 제살깍아먹기식 경쟁이라고 냉소적으로 본다.

그러나 은행들로선 어쩔수가 없다.

남들은 하는데 나만 앉아서 당할수는 없다는 계산이다.

이렇듯 은행들은 기업은 물론 개인들에게도 "힘"을 쓸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좋은 시절 다 지났다"고 한탄만 할 수도 없다.

이같은 추세는 은행들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조류인 탓이다.

은행들은 이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부 씀씀이를 줄이고 부실대출을 줄이는게 우선 해야 할 일이다.

다행히도 국내 은행들은 최근 2,3년간 내실을 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 한햇동안 은행원직원수가 평균 1%가량 줄어들었다.

작년말 현재 점포당 평균 전용면적과 인원도 93년말보다 각각 2.5%와
7.0% 감소하는등 군살빼기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그 결과는 부실축소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말 현재 14개 시중은행들의 부실여신은 1조6천3백18억원.

1년전보다 무려 40.5%나 줄어든 규모다.

이에따라 부실여신비율도 93년의 1.8%에서 1.0%로 대폭 감소했다.

그러나 이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는게 금융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고 세계적인 은행으로 커나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더 고통스런 뼈를 깍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육동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