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은 우촌을 집 안으로 들여 서재로 데려갔다.

함께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는
전갈이 왔다.

사은이 우촌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손님을 만나러 서재를 나갔다.

서재에 홀로 남게 된 우촌이 이책 저책을 뒤적여 보며 사은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창밖에서 여자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우촌이 가만히 창으로 다가가 내다보았다.

꽃밭 속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꽃들을 손질하고 있는 젊은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흑"

우촌은 한순간 숨이 컥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 뒷모습이 미끈하여 남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저 여자가 누구지?

저 여자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촌은 호기심이 생겨 계속 여자를 훔쳐보고 있었다.

여자는 뒷모습만 보인 채 여전히 허리를 구부리고 꽃들을 매만지다가
어떤 꽃은 꺾어서 바구니에 담기도 하였다.

진사은 선생댁에 저런 여자가 있었나.

우촌은 넋이 다 나간 얼굴로,사뿐사뿐 움직이고 있는 여자의 동작
하나 하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촌은 이렇게 외톨이가 되어 겨우 겨우 먹고 사는 형편이고 보니
여자와 살을 섞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욕정의 문제는 자기 스스로 처리를 하곤 하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여자의 몸이 그리워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지금도 붉고 노랗고 푸른 갖가지 꽃들 속에 아래 위로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여자가 섞여 들어가 있으니 눈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주책스럽게도 사타구니 근방이 붕긋이 부풀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사은이 보면 어쩌나 하고 우촌은 서재의 방문
쪽도 흘끗흘끗 돌아보았지만 손님과의 이야기가 길어지는지 사은의
모습은 한참을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사은이 우촌에게 꽃밭 속의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떴는지도 몰랐다.

드디어 꽃들을 한 바구니 꺾은 여자가 슬며시 허리를 펴며 일어나
우촌 쪽으로 돌아섰다.

우촌은 창문에서 약간 비껴서며 여전히 그 여자 쪽으로 시선을 박고
있었다.

"휴우"

우촌은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뒷모습을 볼 때는 얼굴까지 엄청나게 미인인 줄 알았는데 돌아선
얼굴을 보니 수수하고 곱상한 얼굴이었다.

얼굴까지 절세미인이었다면 우촌의 마음이 더욱 타 과거공부도
못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촌은 여자의 얼굴에서 어떤 편안함을 느끼며 인연의 가능성 같은
것도 얼핏 헤아려보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