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서인 "열자"에는 한아라는 기가 막히는 명창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아가 제나라에 들렸을때 옹문이라는 곳의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 끼니를
이었다고 그가 노래를 한번 부르고 지나간 뒤에는 그 여움이 집 천정대들보
에 감돌아 사흘일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아는 어느날 한 여관에 들어 주인과 다투면서 많은 욕을 먹었다.

그는 슬피 울면서 비가를 불렀다.

온 동에 사람들도 따라 울면서 사흘동안 식움을 끊었다.

그는 다시 즐거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손뼉을 치면서 기뿜을 견디지 못했다.

동네사람들은 그에게 노자를 후히 두어 떠나 보냈다.

그뒤로 옹문사람들은 곡가를 잘 불렀다.

그 이임기가 사실이었다면 한아는 영훈의 소리,이 지상의 소리가 아닌
천상의 소리를 지닌 빼어난 명창이었을게 틀림없다.

한민족의 음악사를 들춰 보면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조 후기에
많은 판소리명창들이 탄상했움을 알수있다.

가장 오랜된 명창은 영정조때의 우대춘 하은담 최선달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에 관한 자료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덕 송흥록 염계달 고수헌 신만엽 김제철 박유전 김성옥
등 8명창이 나와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송흥록의 웅장하고 남성적인 동편제, 박유전의 슬프고 여성적인 서로제,
김성옥과 염계달의 동판게에 가까우면서도 고백한 중고제등 판소리유파를
각기 단상시켰다.

철종때에는 박만순 송우호 김세종이 동편제, 이규치 정창섭이 서편제,
김완근 한송학이 중고제를 이어 받아 발전시켰다.

고종때에는 황호통 김석창 김찬섭 박기홍 유성준 김창환 김채만 송만윤
이병백등 많은 명창들이 지금과 같은 판소리를 완성시키면서 각 위파의
특징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 시기에 특기될 일은 최초의 여류명창인 진채선이 탄생되어 허금파와
함께 명성을 떨친 것이다.

구한말 나라가 기울어지면서 판소리도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기에 장판개 박중근 김정문 공창식에서 임방울 김연수로 이어지는
남성명창과 강소춘 김선주 이화중선 김초향 배설향 박선주에서 김여란
김소희 박초월로 이어지는 여류명창이 나왔다.

판소리여류명칭 제3세대로 마지막 생존자였던 김소희역사가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소리의 혼은 명창의 역사처럼 면만히 이어질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