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 한국불교연구원장 >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같은 경제무식쟁이가 경제신문에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떻게보면 우스운 일일지 모른다.

내가 이 글을 청탁받았을때 마침 TV에서는 인도네시아 근로자들의 이른바
"기술연수"의 실상에 대한 리포트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옛날에 운명의 장난으로 인도네시아에서 8.15전후 1년가까이 살았던
적이 있어 그들에 대해 애정이 적지 않다.

화면에서 그들이 우리기업에서 애쓰며 일하는 모습을 보고 말이 안통하는
것이 무엇보다 아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프로와는 관계가 없었지만 다른 나라 연수생들의 집단항의데모
등의 소식이 전해졌을때에도 나는 제발 우리기업인들이 가난한 그 외국인들
을 정말 따뜻하게 대해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월남의 "라이.따이한"에 대해 느끼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죄책감과
수치심에 대해서 우리나라 그곳 주재 관리가 한 이야기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수 없었다.

"뭐 그런거 크게 신경 쓸 필요없어요. 그나라는 원래 이민족의 침략을 많이
받다가 보니까 그런 혼혈이 많은걸요. 우리 라이.따이한의 수는 별거
아니예요"

아마도 정치니 경제니 하는 것은 이렇게 차디찬 냉혈동물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가보다 생각하며 오싹함을 느꼈다.

오클라호마연방정부 폭파사건이 진동하자 원한을 품은 자의 소행이라는
반응이 즉각 나왔다.

이보다 앞서 일본에서는 옴 진리교가 저지른 것이 거의 확실한 도쿄지하철
독가스사건이 있었다.

고베대지진까지도 어느모로 보면 우리네 성수대교나 아현동 가스폭발, 또는
그 이전에 있었던 부산철도 사고, 서해안 페리호 침몰사고등에 비하면 뭔가
성격이나 의미가 다소 다른바 있는 것 같다.

내 강의를 듣는 어떤 젊은 중소기업사장이 이에대한 명료한 답을 준다.

"적어도 우리네 사고는 복수나 원한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니지 않아요"

하늘의 소리, 천뢰를 이야기한 선인이 있었다.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 원효가 "열반경종요"의 대의라는 글에서 웅변으로
말한다.

"열반은 도이다"

흔히 말하는 이러저러한 왜소한 "도"가 아닌 절대초월적인 "대도"라고
말하면서 그는 부처가 깨달음을 통해 그 속에 튀어 들어 간 "도" 그것이
열반이다.

소승들이 석가생존시 35세에 대각을 이루고 이른바 각자가 되었을 때, 그
경지를 열반을 얻었다고 했다.

그 석가가 80세의 나이에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두었을때, 또 그것을 열반
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열반이 두가지 뜻으로 쓰인 것이다.

욕망, 욕망에서 생긴 번뇌의 불길이 자기몸안에 꺼졌다라는 뜻과 이제 그
욕망의 그릇, 인간이라는 몸과 마음이 죽어없어졌다는 뜻이다.

다 없어졌다, 없앴다는 뜻에서 한자로는 멸이라고 했다.

원효는 대승의 대반열반경에서 말하는 "대반열반"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석가세존의 열반때부터 그것은 "우주자연의 영원한 도와
합치" "도의 터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도"는 지금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공계 어디에든지 가 닿지 않는
곳없이 부단해 우리를 깨닫게 하려고 말아닌 말, 특별히 거룩하기만 하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곁에 와 있다고 한다.

그 소리, 그 모습을 듣고보며 본받으라고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원효가 가르쳐주는 "도"의 특색은 그것이 어떤 크기나 부피 무게가 있는
상자와 같이 옆으로 가 닿는 벽이 있거나 밑으로 내려가 부딪치는 바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애(밑바닥이 없고) 무벽(벽이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한하고 영원한 도는 왜소하고 고식적인 도가 아닌 도들의
교만과 배타주의 독선주의가 일으키는 싸움을 더 이상 계속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도는 사람들을 사이사욕에서 벗어나 공이공익에 봉사하게 하여 사람들을
너나할것 없이 행복하게하고 신나게하는 원칙이다.

나는 우리 지도자들이 이 도의 터득을 위해 우리의 선각자 원효에게서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