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행아, 오늘 실이 다 떨어졌구나. 내일 방물장수한테 가서 실을
서너 꾸러미 사오도록 하여라"

봉씨가 수건으로 교행의 등을 문대어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요. 벌써 실이 떨어졌군요. 이런 식으로 바느질감이 계속
들어오면 우리 형편도 불원간 펼것 같군요. 멀리 떠나신 주인님도
돌아오실 거고 영련 아씨도 찾게될 거고"

교행은 영련이 이야기를 하면서 훌쩍 눈물을 삼켰다.

봉씨도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다음날 아침 일찍 교행은 집을 나서 방물장수들이 모여 있는 시장으로
갔다.

교행이 허리를 구부리고 실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고함소리들이
들려왔다.

"길을 비켜라, 비켜서라! 신임 부사님 행차시다"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들이 가마를 타고 지나갈때 흔히 듣게되는
소리라 교행은 처음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않고 있다가 신임 부사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하여 어느집 대문께에 붙어서서 그 행차를 훔쳐보았다.

아전들이 맨 앞에 서서 손들을 저으며 길을 비키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고, 그 뒤로 근엄하게 관복을 차려입은 사령들이 두줄로 늘어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사령들의 행렬이 끝나자 화려한 팔인교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가마위에는 검은 사모를 쓴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신임 부사일 것이었다.

팔인교 가마가 점점 다가오자 신임부사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아!"

어느 한 순간, 교행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신임 부사의 얼굴이 어딘지 낯익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뵌 분이더라?"

교행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다가 손뼉을 탁 쳤다.

그때 신임 부사도 가마 위에서 교행 쪽을 쳐다보았다.

교행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 집으로 도망을 치다시피 돌아왔다.

"착각이겠지, 착각이겠지. 어디 얼굴이 닮은 사람들이 한둘이어야지"

하면서도 고소땅 창문성밖 주인집 꽃밭에서 바라본 그 얼굴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주인의 서재 창문에 붙어서서 이쪽을 몰래 내다보던 그 준수한 얼굴
말이다.

이 이야기를 주인마님에게 할까 했으나 착각이면 어쩌나 하고 망설
이다가 교행은 밤이 깊어 평상시처럼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그러나 계속 몸을 뒤척이며 잠을 잘 이루지 못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