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체거래를 피하라" 은행들이 건설업체 노이로제에 걸렸다.

잘 나가다가도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는게 건설업체의 특성이다.

건설업체 부도는 주거래은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천억원대의 부실여신을 떠안긴다.

지난 93년 (주)한양에 걸려든 상업은행이 그랬고 이번에 유원건설부도
파문에 휩싸인 제일은행이 그렇다.

이런 피해를 회복하려면 최소 10년은 지나야 한다.

이에따라 은행들 사이에선 건설업체기피풍조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지금 잘나가는 건설업체라도 "다시 한번 살펴보자"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중견업체로 꼽히던 건설업체들이 최근 부도설에 휩싸이거나 갑작스레
자금난을 호소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건설업체부도가 은행부침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대 초반 조흥은행은 건설업체가 관련된 대형사고에
잇달아 강펀치를 맞고 KO됐다.

지난 82년 공영토건이 관련된 이철희.장영자사건이 터졌다.

이듬해인 83년 9월엔 영동개발사건에 휘말렸다.

두 사건이 미친 사회적 파장도 엄청났지만 조흥은행은 존폐의 기로에
내몰렸다.

당시 두 명의 은행장이 잇달아 구속됐다.

지난 80년 1백2억원에 달하던 당기순이익은 83년 57억원으로 반감됐다.

83년기준 총자산(4조7천7백56억원) 원화예수금(2조1천6백81억원)
자기자본(2천13억원)등 각종 계수도 5대 시중은행중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저러다 문닫는게 아니냐"는게 금융계의 우려였을 정도다.

그러나 조흥은행은 10년이 지난 지금 으뜸은행으로 우뚝 섰다.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1천3백63억원으로 83년보다 20배이상 늘었다.

총수신이나 업무이익에서도 은행권수위를 차지했다.

조흥은행이 10여년전의 건설업체악몽을 극복한 요인은 여러가지다.

그중에서도 조흥은행직원들이 꼽는 첫번째 요인은 건설업체거래를
완전히 끊었다는 것.

한 임원은 "이.장사건과 영동개발사건이후 건설업체거래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게 정확하다"고 말했다.

상업은행도 건설업체로 인해 "화려한 영화"를 과거형으로 돌린
대표적 케이스다.

지난 82년 조흥은행과함께 이.장사건에 휩쓸렸다.

이어서 83년엔 명성사건에 연루됐다.

그 유명한 "혜화동지점 수기통장사건"이 그것이다.

두 사건으로 상업은행은 70년대 선두은행이라는 간판을 다른 은행에
내주어야 했다.

당기순이익은 80년 2백6억원에서 83년엔 4분1인 56억원으로 줄었다.

상업은행이 이런 피해를 극복하는데는 10년이 걸렸다.

다시 한창 옛 영화를 재현할 무렵인 지난 93년.이번에 (주)한양이
부실처리됐다.

이 때 상업은행이 떠안은 부실여신은 5천억여원.이에따라 울며겨자먹기로
상업증권(현 일은증권)을 매각하고 "자구은행"이란 불명예를 뒤집어
쓰기에 이르렀다.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이 건설업체망령에 사로잡혀 휘청거릴때 가장
약진을 한 은행이 제일은행이었다.

80년대 특별한 사고도 없었던 제일은행은 90년부터 내리 3년동안
모든 계수에서 은행권 최고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지난 93년부터 크고 작은 건설업체 부도에 얽매였다.

93년 학산종합개발과 94년 효산종합개발부도로 인해 1천5백억원의
여신이 묶인 제일은행은 이번 유원건설 부도로 3천7백30억원이 부실로
처리돼 "부실이 가장 많은 은행"으로 추락했다.

이밖에 지난2월 덕산그룹부도로 장기신용은행은 3백억원의 여신이
묶인 것을 비롯 은행장이 구속되는 수난을 감수해야했다.

서울신탁은행도 대형건설업체부도와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효산종합개발
부도등 잇단 "잽"을 맞고 한때 휘청거려야 했다.

이같은 사실은 건설업체부도가 은행의 흥망과 정비례한다는걸 보여준다.

따라서 은행들이 건설업체거래를 기피하는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건설업체도 일반 기업체와 마찬가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은
여신심사에 대한 은행책임으로 귀착된다.

유원건설이란 포탄을 맞은 제일은행이 다시 "으뜸은행"으로 거듭날수
있을지,또 어떤 은행이 건설업체에 발목잡혀 10여년을 허우적거릴지
주목되는 순간이다.

< 하영춘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