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가씨댁이라면?" 우촌이 짐작되는 바가 있어 한번 확인을
해보았다.

"그야 녕국부와 영국부의 가씨댁이지" "그럴 줄 알았네"

"그 장안의 가씨와 자네 집안의 가씨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건가?"
자홍이 술기운으로 벌개진 얼굴로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우촌에게 물었다.

"그야 멀리 따지면 어딘가에서 닿는 구석은 있겠지. 동한때 가복이라는
선조로부터 퍼져내려온 자손들이 지금은 각 지파별로 엄청나게 번성해
있지.

중국 어느 성(성)에 가도가씨들이 널려 있는 편이지. 그런데 지파마다
그 형편들이 다르단 말이야.어느 지파는 녕국부나 영구부처럼 세도가문을
이루어 떵떵거리며 살고, 어느 지파는 우리 가문처럼 가난하고 초라한
신세로 몰락해 있고 말이야.

같은 가씨라도 어느정도 수준이 맞는 지파들끼리는 먼 친척이라 하더
라도 가까운 친척인 것처럼 서로 교제가 있지만,형편이 크게 차이가 나는
지파들끼리는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 된다 하더라도 일체 교류가 없단
말이야.

형편이 월등히 나은 쪽에서는 가난한 친척들이 재산을 뜯어가면 어쩌나
하고 꺼리고,형편이 초라한 쪽에서는 또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해서 형편
좋은 친척들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고 말이야.

그래 어떤 지파들은 마치 원수나 진것처럼 등을 돌리고 살기도 하지.

이게 친척이라는 것의 정체요 실상이야.자기에게 유리할 때만 친척이지,
불리할 때는 친척이고 나발이고 내 몰라라지"

소위 세도가문을 이룬 친척들에게 설움을 받은 적이 많은지 우촌이 거의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죽 했으면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나왔겠나" 자홍도 우촌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 그 녕국부와 영국부의 가씨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일전에
나가 보았을 때는 거리의 태반이나 차지할 정도로 으리으리한 저택에
온갖 사치를 다하고 사는 것 같던데"

우촌이 호기심을 나타내며 자홍의 대답을 기다렸다.

"꼭 그런 것도 아니네.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녕국부와 영국부도 퇴락해 가고 있는 중일세"

"퇴락이라니? 그런 가문이 쉽게 퇴락할 리가 있나" 우촌이 못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주모가 또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새로 나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