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단이나 발불단이라" 1895년 11월15일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의
유림은 목은 자를수 있을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수 없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경향 각지에 파견됐던 체두관(체두관)에게 머리를 깎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선비들이 남긴 문집을 보면 그들에게 상투는 생명과 맞바꿀
만큼 절대적인 효의 상징이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어떤 선비는 머리를 깎이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기위해 허리 춤에 찬
주머니에 항상 아편 덩어리를 넣고 다녔다.

충주 "우리재"사람인 과암 신익균(1879~1939)은 머리를 깎이지 않으려고
산속에 들어가 훈장 노릇을 하면서 "상투철학"을 나름대로 정리해 놓았다.

과암은 머리카락이 "사람의 뿌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머리털을 한데 묶어서 상투를 튼 다음에라야 천도에 응할수 있고
수만 올의 머리카락이 하나로 묶여지는 것은 천하통일의 상징이라는 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관혼상제중 관례가 가장 앞서는 것도 이 때문 이며 죄인의 머리를 깎는
것을 "천형"이라고 한것도 하늘과 단절시킨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목이 베어진 귀신이 될지언정 머리를 깎은 사람이 될까보냐"고 버티던
유자들의 고집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작 국왕은 "단발령"을 내린 당일 내부대신 유길준의 강요에
못이겨 태자와 함께 단발을 했다.

농상공부대신 정병하가 고종의 상투를,유길준이 태자의 상투를 잘랐다.

이처럼 국왕이 머리를 깎아버리자 개화기의 유행이었던 "하이칼라"가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일제때는 이발소가 "개화의 첨단"이었고 "하이칼라"를 창조해 내는
멋쟁이 이발사는 "부러운 직업"이었다.

운전사는 "사"자를 쓰고 이발사는 "사"자를 쓴 것만 보아도 정황은
짐작되고 남는다.

전국 3만여개의 이발소가 지난 한햇동안 4천개나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다.

이용기술이 신세대 감각에 맞지않고 값도 비싼 탓으로 목욕탕 간이
이발대나 미용실에 밀려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퇴폐영업이 금지된 것도 그 원인중의 하나다.

올해는 "단발령"이 내려진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오는 25일 "이용사의 날"에는 서울88체육관에서 "전국 이용인
기술대회"도 연다고 한다.

사양화하는 이발소를 살려보겠다는 이용인들의 안간힘을 보는 것 같아
안스럽지만 과연 그들이 "과거의 번영"을 어떻게 되찾을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