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를 통해본 한중묵연전"이 21일~6월4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762-0442)에서 열리고 있다.

간송미술관산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48회 정기전.

이번 전시회에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젊은 시절 중국에 건너가
담계 옹방강(1733~1818)과 운대 완원(1764~1849)등 당시 청나라
학예계의 대표적 인물들을 만나고 돌아온뒤 이들 양대문파의 사우들과
주고받은 묵적진보들이 집중적으로 선보인다.

전시작은 추사의 작품 20여점과 주학년 홍점전 담광상 유화동등
청대 유명서화가및 학자들의 작품 40여점등 60여점.

청대작품 40여점은 추사가 청나라 수도 연경에서 교유했던 양대문파의
인재들과 무려 50여년간이나 서신교환을 하는동안 그쪽에서 보내온
것들이다.

추사가 처음 중국에 간것은 24세때인 1809년(순조 9년).

생원시에 합격한뒤 때마침 동지부사가 되어 연경으로 가는 생부
유당 김노경을 수행,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19세되던해 스승인 초정 박제가를 여의었지만 북학전반에 대한 이해를
착실히 다져놓아 그의 이름은 이미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던 상태.

따라서 옹방강문하의 기라성같은 제자들과 곧 친숙해질수 있었고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소문대로 뛰어남을 간파한 이들은 자신들의
스승이자 연경학계의 태두인 담계와 추사를 상면시킨다.

어렵게 만난 두사람은 서로의 학문에 호감을 갖게되고 추사는
제자예를 갖추어 입문을 간청, 담계가 이를 쾌락하게 된다.

이때 추사는 진기한 서화명품과 도서진적들을 감상하며 고증감식법을
익히고 자신의 예술적 사상의 골격을 세우게 된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시기에 청나라 고증학을 집중적으로 연구, 습득한
추사는 귀국한뒤 북학파의 대표주자로 부상하면서 우리나라 금석학의
체계를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된다.

추사는 특히 자신이 세운 금석학이론을 바탕으로 "금석과안록"이라는
명저를 저술했고 북한산비와 황초령비를 분석, 이 비가 신라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편 추사는 회화에 있어서도 남종화계통의 독자적 화풍을 개척,
"세한도"등 국보급명작들을 남겼는데 사실보다 품격을 강조하는
선미가 강하게 느껴지는 명품들이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최완수간송미술관연구실장은 "추사체가
이루어지던 당시의 한중묵연의 현황을 한눈에 볼수있는 전시회"라고
말하고 "이번에 전시되는 자료 역시 일제강점시 추사연구를 빙자한
일본인학자들의 손에 거의 넘어간 것을 간송 전형필선생이 사재를
털어 수집.보관해오던 것들"이라고 밝혔다.

< 백창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