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엄마도 그런거 아세요?"

"애는 ?요세 엄마들도 그 정도는 다 안다"

국민학생 아들과 어머니가 새로나온 컴퓨터를 놓고 신기한 성능에 대해
대화하는 상품광고의 한장면이나, 그래도 여기서는 젊은 엄마를 내세워서
두세대의 폭넓은 소비자층을 확보하려는 상혼때문에 세대차이를 될수
있는대로 나타내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젊은 세대들은 새로운
기계나 기술을 논하는 데에서는 부모세대를 지도외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난 한세대동안에 달라진 과학기술,특히 전자기술은 우리 생활을
완전히 바구어 놓아서 50년전만 해도 애기책에나 나오던 황당한 일들이
모두 실현되고 있다.

초음속 비행기만 타면 보통사람들도 뉴욕에서 아침을 먹고 떠나 빠리
에서 오찬회의 하고 그날로 돌아올수 있으니 축지법을 쓰며 신출귀
하는 도시가 될수 있고 전송 화면을 통해 한곳에 앉아서도 지구의
다른 끝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실제로 훤히 볼수 있느니
말 그대로 모두 천리안이 된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꿈같은 일들을 우리 눈앞에 현실로 만들어준 전자기술의
무시할수 없는 역기능은 우리사회에서 어른들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집안에서 새로운 가전제품을 장만해서 처음으로 작동하려면 대학교수라는
아빠는 취급설명서를 꼼꼼히 읽고도 영 자신이 없이 이리저리 살피고
이것저것 해보고도 잘 안될때 옆에서 딱하다는듯이 참고 기다리던
꼬마는 그림 한번 쓱보고 척척 맞추고 끼우고 하면 거짓말같이 쉽게
잘 돌아 간다.

다음부터는 아예 새 물건만 사면 엄마는 아이부터 부르고 아빠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

사무실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다.

머리가 허연 부장님, 과장님들이 대학을 갓나온 애숭이 신입사원의
눈치를 보아가며 컴퓨터를 배운다.

열심히 하긴 하지만 영 잘되지 않는다.

기능키 하나로 간단히 처리되는 과정을 쩔쩔매고 있다가 할수 없이
젊은 직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어쩌다가 젊은 직원이 봐주느라고 "아이 그래도 그 연세에 그 정도로
아시는 것도 놀라운거죠"하고 신통하다는듯이 위로를 하면 금새 기분이
좋아진다.

어라전까지만해도 나이가 많은 윗사람들이 아는 것이 많았고 따라서
힘을 가지고 있어 장유유서의 원칙이 자연스럽게 지켜졌다.

배우는데 자소가 있겠느냐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선생이라는 단어가
먼저 낳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것만봐도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가르침의 행위는 내림으로 이루워져 왔다.

교육에서 스승의 권위는 곧 제자들의 신뢰와 존경의 원천이며 젊은이들은
스승의 학식이나 기술뿐 아니라 인품과 지혜를 배우고 본받으려는 것이
총체적인 인간교육의 기본이었다.

요즈음의 기술위주 교육제도가 참된 인간을 만들기위한 인성교육이
부족하다는 사회적인 비판에서 나이든 세대들이 기술면에서 좀 굼뜨다고
해서 주눅이 들어 어른노릇을 쉽게 포기하고 교육의 의무를 져버리고
있는데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기계의 영향력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역이 계속 확대되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여건이 바뀐다해도 우리는 여전히 오욕칠정
을 간직한 더도 덜도 아닌 인간으로 면면히 이어 갈 수밖에 없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같이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변화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을 구별하여 가르쳐주는 것이 진정한 인간교육이 아니고 무엇일까.

서로를 이해하여 사귀고 서로를 존중하여 섬기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행동이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드는 길임을
가르칠수 있는 스승은 이일 저일 당하면서 이세상을 웬만큼 살아 본
사람이어랴 한다.

경륜이 없이 지혜를 터득할수 없기 때문이다.

어른세대는 먼저 태어난 사람의 의무를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