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쌀회담은 말그대로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회담과정을 좇는 과정에서 회담대표.정부관계자들과 언론과의 숨막히는
추격전도 전개됐다.

회담이 최종타결된 21일 이번 쌀회담을 취재한 기자들은 한결같이 "영화
한편 찍었다"는 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만큼 보안유지가 잘 됐다는 얘기다.

대북쌀지원 비밀회동 프로젝트는 청와대와 안기부에 의해 입안, 추진됐다.

일각엔 이홍구총리의 아이디어라는 설도 있다.

내용을 아는 사람도 김영삼대통령을 포함, 10명을 넘지 않았다.

최소한 16일 오전까진 그랬다.

그러나 16일 오후 남북한 차관급 회동이 다음날 북경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언론과 정부와의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우리측 회담대표가 이석채재정경제원차관으로 알려진 건 16일 저녁6시쯤.

그러나 청와대를 비롯 재경원,통일원,외무부등 어느 곳에서도 쉽게 확인해
주지 못했다.

나웅배부총리는 아예 기자들을 피해버렸고 송영대차관은 "그런 일 없다"고
잡아땠다.

송차관은 이 사실을 16일밤에야 알았다는 후문이다.

통일원이 이번 프로젝트권 밖에 있었음을 알게하는 대목이다.

공노명외무장관은 "5층(통일원)에 가서 알아보라"며 자신 역시 권외인물임
을 시사했다.

다음날인 17일 오전.이차관은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북경에) 왜가냐"며
딴전을 피웠다.

그는 과천집무실에 나오지 않고 밖에서 아침시가를 한후 청와대에 들러
곧바로 출국했다.

그가 10시30분 비행기편으로 북경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나왔다.

북경주재 특파원등 수십명의 기자가 북경공항에서 그를 기다렸으나 허탕.

이차관일행은 일본 홍콩을 경유해 입국, 꼬리를 감쪽같이 감춰버렸다.

그가 나타나지 않자 특파원들 사이에선 "이차관이 평양에 갔다"는 애기도
돌았다.

이차관은 본명을 이용치 않고 "특수목적 여권"을 이용, 입국했다고 한다.

17일 저녁 남북한 대표들은 북경반점에서 첫회동을 가진후 장소를
샹그릴라호텔로 옮겼다.

그러나 기자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들자 "해쳐모여"를 시도, 종적을 감췄다.

양측은 이날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와 조선삼천리총회사간의 실무협의
결과를 토대로 "우선 5만t"에 합의했다.

이어 18일과 19일에는 10만t 추가지원문제및 수송방법.발표주체등 세부
사항에 관한 논의를 진행했다.

회담 고비는 20일에 찾아왔다.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은 이날 밤께 최종합의문이 발표될 것이라고 밝혀
모든 언론사가 회담장소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21일 새벽2시반까지도 합의문 발표가 나오지 않자 회담이 결렬
되는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21일 오전이 되자 양측합의가 "합의주체"등의 문제로 다소 지연돼 오후중
최종 합의문에 서명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결국 양측은 21일 오후2시쯤 최종합의에 도달, 4시에 나부총리가 합의문을
발표함으로써 5일간의 회담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이번 회담대표에 왜 하필이면 이차관이 선정됐느냐에 관해선 아직도
말이 많다.

현재 관측통들 사이에선 청와대 외교안보팀(외무부세력)이 재경원에
예산상의 민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 외교안보팀이 통일원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 이차관에 대한 김대통령의 신임이 두텁기 때문이라는
설등이 어지러이 나돌고 있는 상태다.

<김정욱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