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상처와 충격으로 얻은 진씨의 병인지라 쉽게 나을리 없었다.

국화가 한창일 무렵,가용의 할아버지 가경 대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일가친척들이 녕국부로 모였다.

그들은 가경 대감의 생일축하는 뒷전이고 이런 기회에 어떻게 하면
흥겹게 놀 수 있을까 그 궁리만 하였다.

그래서 극단을 불러오고 악사들을 청해 오기도 하였다.

희봉은 보옥을 데리고 우선 진씨 병문안부터 하러 갔다.

보옥은 진씨방으로 들어가 앉아 있으려니 언젠가 이 방에 와서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경환 선녀에게 이끌려 그 여동생이라는 겸미 선녀를
만나 운우지정을 나누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겸미의 자가 가경이라, 보옥이 미진 나루터 검은 강물에 빠질때
가경아 사람살려라 하고 고함을 지르다가 잠에서 깨어난 기억도 났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진씨의 이름이 가경이 아닌가.

가경은 진씨의 어릴적 이름이라 보옥이 그 이름을 부를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진씨의 배다른 동생인 진종을 동무로 사귀고 나서부터 차츰
그런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한 기억 하나가 떠올라 보옥은 얼굴이 창백해질
지경이었다.

경환 선녀를 따라 태허환경 박명사로 가서 금릉의 빼어난 열두명의
여자 운명을 기록한 "금릉 십이채 정책"을 뒤지다가 대들보에 목을 맨
미인그림을 보았는데, 그 그림 이야기를 시녀 습인에게 하자 습인은
시아버지와 정을 통한 여자의 운명일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자의 성은
정이라는 말과 비슷한 진일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자 얼마 전에 녕국부에 놀러 와서 초대가 재 위를 기는 놈 어쩌고
하며 술주정을 할때 희봉을 비롯한 집안 사람들이 당황해 하고 진씨는
기절까지 하던 일을 목격한 것이 그냥 우연같지는 않았다.

진씨 역시 죽음이 가까운 지금 보옥을 보자, 보옥이 낮잠을 자다 말고
가경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잠에서 깨어나던 그 이상한 일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왜 그 때 자기의 어릴적 이름을 불렀는지 꼭 물어보고만 싶었다.

하지만 희봉이 보옥의 표정이 침통한 것을 보고 가용더러 보옥을
회방원으로 빨리 데려가서 연극구경을 시켜주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희봉은 죽음을 예감하며 낙담해 하는 진씨를 간곡한 마음으로 위로하고
자기도 회방원으로 향하였다.

회방원 옆문을 들어서니 그림같은 풍경이 시야에 가득 펼쳐졌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