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3년 7월20일 성북동 한국엔지니어클럽에선 철강공업발전 민간협의회
회의가 열렸다.

한보철강이 당진공장을 짓기위해 아산만을 한창 메우고 있던때다.

이 회의에서 한보철강은 포철의 박슬래브공장 건설계획에 정면 반대하고
나섰다.

동국제강등 다른 전기로업체들도 한보의 편에 섰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고철때문이었다.

박슬래브는 전기로에서 고철을 녹여 그 쇳물로 핫코일을 만드는 설비.

가뜩이나 고철이 모자라는데 포철까지 고철을 원료로 쓰는 설비를 도입해서
"어쩌자는 거냐"는게 전기로업체들의 주장이었다.

이 문제는 포철이 국내 고철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선에서 양해가
됐지만 그만큼 고철부족이 심각하다는 걸 반영한 회의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난해 국내고철수요는 모두 1천6백31만3천t.

93년보다 11.2% 늘어난 규모다.

철강업체들은 이중 1천1백34만6천t을 국내에서 조달한다.

나머지 4백96만7천t은 물론 수입으로 메웠다.

수입의존도는 30.4%.

그 정도라면 그래도 괜찮다.

문제는 앞으로다.

국내철강업체들의 전기로 신.증설 추세로 보아 고철수급난은 갈수록
심각해질게 분명하다.

당장 한보철강 당진공장 1단계 준공(연산 3백만t)이 몰고올 파장을 걱정
해야 하는 형편이다.

문영일동국제강자재부장은 "2000년이 되면 수입규모를 6백~7백만t으로
늘려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철확보를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철강협회의 전망은 더 비관적이다.

2001년 수요는 3천3백60만t.

이중 1천만t이상을 수입으로 충당해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수요초과 현상이 값을 끌어올릴건 불문가지.

6월 현재 고철수입가격은 t당 1백81달러(C&F기준).

1년전에 비해 무려 40달러(28.4%)나 올랐다.

일시적으로 값이 올랐다면 떨어질수도 있을텐데 상황은 그게 아니다.

"세계적인 미니밀(전기로)증설로 수요가 꾸준히 늘고있어 작년과 같은
1백50달러 이하는 앞으로 기대하기 어렵다"(김문치철강협회조사부장)

"고철은 한국철강산업의 발목을 잡을 수있다"(김호강원산업상무)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발목을 잡을수도 있다"는 것은 철근이나 형강등 전기로제품의 제조원가중
고철의 비중(50%)을 봐도 금방 알수 있다.

전기로 업체의 경영을 고철이 좌지우지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철자급은 언제쯤이나 가능할까.

김문치철강협회조사부장은 "빠르면 2010년 늦으면 2030년이나 돼야 가능
하다"고 본다.

고철발생의 기초가되는 철강축적량 증가추이를 고려하면 그렇다는 설명
이다.

물론 천연가스등으로 철광석을 태워 만드는 DRI(직접환원철)등 고철대체재
를 개발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국내업체중에서도 포철과 한보철강이 연산 70~80만t규모의 DRI공장을 계획
하고 있다.

그러나 가스를 원료로 사용해야하기 때문에 생산을 확대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이렇게 보면 고철수집을 최대한 늘리는 길외엔 대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업계는 주장한다.

수도권 마산.창원 울산인근 전국주요지역에 야적기능을 갖춘 고철가공단지
를 세워야 한다고.

이같이 유통단계를 축소하는등 유통구조개선이라고 해야 어느정도나마
가격안정을 기할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고철은 이젠 "엿"이나 바꿔먹는 "고물"이 아니다.

철강산업의 앞날을 좌우할 수있는 원자재다.

"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면 "고철은 철강의 쌀"이라고나 하까.

< 이희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