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당선이 확실시되는 조순씨(67)는 1928년 강원도 명주군 구성면
학산리에서 유학자 조정재씨의 1남2년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강릉중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판사로 재직하고 있던 숙부
조평재씨에게 맡겨져 평양중학교를 다녔다.

평양중학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경기중학(경기고교전신)에 편입한뒤
법조인이 되길 원했던 숙부의 희망을 뿌리치고 서울대상대전문부에 진학한다.

케인즈같은 경제학자가 되어 수천년 가난을 해소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경제학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서울대상대는 당시만 해도 부기등을 가르치는 정도.

청년 조순은 대학생활에 흥미를 잃고 영문학에 심취한다.

이기간중 20세의 나이로 같은 고향출신의 김남희씨와 결혼한다.

49년 7월 대학졸업후 강릉농고 영어교사로 지원한다.

그러나 6.25가 터져 육사영어교관으로 발탁괸다.

여기서 노태우 전두환 전대통령의 은사가 되는 특이한 인연을 맺게 된다.

육사교관을 지내면서도 경제학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던 그는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동북부에 있는 보든대학에서 학부생활을 마치고 버클리대학에서
''후진국의 외자조달방안''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햄프셔 주립대학에서 조교수생활도 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한 조순
박사는 68년에 귀국, 모교인 서울대상대 교단에 선다.

경제학자로서의 그는 자율경쟁과 올바른 규율을 신봉한다.

흰 눈썹을 휘날리며 제자들과 산에 오르내려 ''산신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경제학자 조순은 88년 12월 노전대통령의 제의를 받아들여 경제
부총리로 변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부총리로서 긴축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토지공개념등을 추진했다.

균형과 형평, 안정을 특히 강조했다.

그러나 86~88년 3저호황으로 두자리수를 넘겨 성장하던 경제가 89년에 6%
대로 떨어졌고 이에따른 정치권과 재계의 불평으로 그의 입지가 좁아진다.

한국중공업 민영화문제를 놓고 경제수석과 마찰로 사표소동을 빚기도 했다.

행정경험이 미숙해 다른 경제부처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평을 듣기도 한
학자출신 조순부총리는 1년 3개월만에 퇴진한다.

그로부터 2년휴인 92년 3월 중앙은행총재로 현실 경제에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정주영 당시 국민당 대표에 대한 고소취하
문제등으로 김영삼정부와 갈등을 빚어 1년만에 물러난다.

한은총재를 그만둔 뒤에 개인사무실인 소천서사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다
이화여대에 석좌교수로 앉게 된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대쪽 학자''의 이미지를 얻은 그에게 지난 93년말
정치권과 인연을 맺게된 계기가 찾아왔다.

청계은퇴를 선언하고 아태평화재단을 창설, 통일.외교분야연구에 나섰던
김대중 이사장의 재단영업교섭이 온것이다.

조교수는 재단 자문위원을 맡았고 1년반여후 김대중 이사장의 권유로
민주당에 들어가 경선을 통해 서울시장후보로 선출됐다.

부총리시절 봉천도 자택에서 관악산을 넘어 과천으로 출근할 정도로 등산
을 즐기고 일요일 하산길에는 제자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한시를 읊곤 했다.

부인 김남희 여사(64)와 장남 기송(LG전자상무), 차남 준(현대병원소아과
의사), 3남 건(사업), 막내 승주(포항공대대학원 박사과정)씨등 4남을 두고
있다.

조직장악능력이 다소 뒤진다는 평을 듣는 그가 인구 1천1백만명의 서울시
를 책임지는 소대통령이 되면 어떤모습을 보일지 주목된다.

< 고광철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