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전자산업의 자존심 필립스그룹이 둥지를 틀고 있는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시.

필립스가 도시의 전부라고해서 필립스시로 더 유명한 이 도시의 한 복판
에는 하얀빛 비행접시모양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필립스전시관이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필립스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 온다.

100여년전의 백열전구에서부터 형광등 전기면도기 커피포트 X레이투시기
텔레비전 콤팩트디스크(CD) 반도체까지 없는게 없다.

뿐만 아니다.

각종 전자제품의 발전모습도 한눈에 알수 있다.

텔레비전의 경우 50년전에 만들어진 진공관TV를 비롯 흑백TV 컬러TV 평면
화면TV 와이드TV 고선명TV(HDTV)등이 차례로 전시돼 있다.

전시제품을 둘러보다보면 한가지 공통된 수식어를 발견하게 된다.

"세계 최초"가 그것이다.

과거제품만 세계최초가 아니다.

현재 일상화된 CD는 물론 앞으로 멀티미디어시대를 이끌어갈 쌍방향CD(CDI)
등 대부분의 전자제품이 바로 필립스의 창작품이다.

필립스전시관이 아니라 세계전자역사발물관이라 불러야 옳을듯 싶을
정도다.

전시관만 살펴보면 필립스는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최대전자회사여야
마땅할 것 같다.

대리점이 아인트호벤시에까지 들어와있는 소니등 일본기업들에 하등 뒤질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안내를 맡은 길버트홍보부장은 이에대해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시장
개척으로 연결하지 못한 것이 그동안 필립스의 약점이었다"며 "지금 그
약점을 보완하는데에 회사의 모든 힘을 쏟고 있다"고 말한다.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소비자의 기호에 맞게 상품화,시장점유율을
높인다" 이것이 필립스가 추진하고 있는 세계화전략의 요체다.

뛰어난 기술개발력에 걸맞는 디자인및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멀티미디어
시대의 선도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 유일의 무국적 기업"이란 별명에서 알수 있듯이 세계화에
관한한 필립스를 따라갈 기업은 별로 없다.

100년 필립스의 역사(1891년설립)는 곧 세계화의 역사였다.

1920년대에 이미 유럽 브라질 인도등에 지사를 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네덜란드는 국토가 작기 때문에 초창기부터 해외에 나가지 않으면 살아
남을수 없었다.

그러자니 자연 초일류기술개발이 필수적이었다"(길버트부장) 초일류기술을
바탕으로한 필립스의 세계화전략은 승승장구였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필립스면도기를 비롯 형광등 라디오 TV등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제품은 필립스를 소비자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기업으로
만들었다.

필립스의 "기술지상주의"는 그러나 70년대후반부터 일본기업들의 도전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대표적인게 VTR와 CD.필립스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초 당시 전자업계의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VTR와 CD를 잇달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결과는 과거완 달랐다.

미국시장은 물론 안방이라 여기던 유럽시장에서조차 소비자의 입맛에 척
맞는 디자인과 최고의 서비스로 무장한 일본기업들에 참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대부분 사람들이 CD를 일본소니사의 창작품으로 착각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같은 위기에 대처해 도입된게 신세계화전략이다.

창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 90년 25억달러라는 대규모 적자를 계기로
필립스는 "우리는 본질적으로 엔지니어 군단일 뿐이다"(얀 티머회장)는
결론에 도달했다.

기초연구 부문에는 발군의 능력을 갖추었으나 상품화단계에서는 항상
머뭇거려 "재주만 실컷 부리고 실속은 일본기업이 챙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일류기술에 소비자의 기호에 딱맞는 신디자인과 마케팅을 접목한다는
신세계화전략은 우선 현지기업과의 활발한 제휴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지난해 이탈리아의 디자인전문회사인 알레시와 손을 잡은게 대표적 예다.

식빵모양의 토스터와 곡선을 강조한 커피포트등 기존의 필립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잔재주가 가미된 제품들이 제휴의 결과물이다.

지난해엔 미국의 그레프사와 합작, 민영유선TV업체를 설립했다.

멀티미디어시대에 필수적인 각종 소프트웨어를 현지사정에 걸맞게 개발
하기위해서다.

음반제작 전문업체로 설립한 폴리그램에서는 세계 100여개의 프로그램
제작업체와 제휴를 추진중이다.

이외에도 자동차용 자동항법장치와 전화선을 통한 유료비디오서비스에서도
제휴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필립스는 이와함께 세계 60여개 생산공장과 150여개 판매회사를 말그대로
현지화했다.

현지인을 책임자로 임명하는 것을 원칙으로해 디자인과 스타일을 각 나라
사정에 맞게 채택토록 했다.

소형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의 경우 유럽 싱가포르 브라질등으로 분산
시킨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 공장들은 같은 기초기술을 다양한 디자인으로 포장하고 있다.

등록상표도 필립스외에 700여가지로 다양화했다.

그 결과 전기면도기는 미국에서 놀렐코브랜드로 팔리고 소형가전제품은
브라질에서 왈리타브랜드로 판매되고 있다.

첨단기술에 대한 로열티수입에 만족하던 필립스로선 대단한 변화인 셈이다.

아울러 그룹이사회에 외국의 전문경영인을 대거 영입,경영진을 다국적화
했다.

현재 이사회멤버 14명중 네덜란드인은 5명에 불과하다.

지난해 멀티미디어 전초기지로 뉴욕에 설립된 필립미디어의 대표 스코트
마돈씨는 미국투자은행가 출신이다.

필립스는 이런 전략을 바탕으로 세계전자업계의 수장자리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차세대형 종합가전제품인 CDI와 제5세대 음향기기로 불리는 디지털콤팩트카
세트(DCC)가 필립스의 꿈을 실현시킬 대표주자이다.

CDI는 TV 오디오 게임기 PC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수 있는 가정용 멀티
미디어.

DCC는 카세트 테이프에 콤팩트디스크 수준의 재생력을 부여한 것으로
모두 필립스의 창작품이다.

"DCC시장의 경우 소니사의 디지털오디오테이프(DAT)나 미니디스크(MD)의
도전이 거세지만 예전의 필립스가 아닌 만큼 결과는 두고 보면 알것"(길버트
부장)이라고 단언할 정도다.

1891년 백열전구공장을 설립한 이래 "빛"으로 세계를 정복했던 필립스.

그러나 "소리"를 매개로한 세계정복에는 실패하고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필립스.

필립스는 이제 탄탄한 기초기술력에다 신디자인 마케팅등 신세계화전략을
가미, "멀티미디어시대"에 다시 전자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