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단교" 언뜻 뜻이 떠오르지 않는 고사성어 같은 이 말을 (주)백양
에서는 자주 들을 수 있다.

노와 사가 수시로 만나 단체교섭을 벌인다는 뜻이다.

미리 공문을 보내 약속한 후 대형회의실에서 마주 앉는 대신 이 회사
노사는 일이 있을 때면 언제든 만난다.

공장장이 노조사무실을 자주 찾고 노조위원장도 공장장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하며 노사현안을 토의하는 식이다.

그래서인지 전주공장장실은 유달리 수수하다.

들어서는 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배려가 깔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백양은 세계 70여개국에 연간 8천만달러어치 이상의 메리야스를 수출하는
세계적인 섬유업체.

전주공장은 매달 1천2백만벌,하루 40만벌 이상의 메리야스를 생산하는
주력공장이다.

전주공장은 전주역에서 10분,팔복동 공단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2만평 넓은 공장에 종업원은 모두 합해야 8백50명.

노동집약적 산업의 대명사인 섬유업체치고는 적은 숫자다.

원단생산까지만 백양이 책임지고 봉제는 협력업체가 맡는 분업체제가 구축
돼있기 때문이다.

자사 인력으로 일관생산체제를 갖추려면 최소 2만명 이상의 종업원이 필요
하기 때문에 봉제는 모두 하청업체에 맡기고 있다.

종업원이 적다보니 노조원도 적다.

2백명이 채 못된다.

일부에서는 그래서 이 회사의 노사협력관계를 "섬유경기가 하락하면서 힘이
약해진 노조가 회사측에 백기을 든 것"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이 회사노조 김종년위원장은 이런 시각에 불만이 많다.

백양의 노사협력관계는 어디까지나 선진화된 협력기반을 구축돼있어 가능
해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조직률만 해도 그렇다.

"조합가입대상자 수가 적을 뿐 여타 제조업체와 비교할 때 조직률은 비슷한
수준"이라는 설명.

관례적으로 노조에 가입하지 않는 관리직 사원만 3백명이 넘기 때문이다.

김위원장의 자심감은 노조의 연륜과 연관돼있다.

백양 노조는 지난 80년에 설립돼 올해로 16년째.

갈등과 아픔을 모두 겪어봤다는 얘기다.

그사이 분규는 한차례 있었지만 오히려 도약의 계기가 됐다.

87년 일주일간 파업을 벌였다.

하필 내의류가 호황물결을 타던 때라 회사의 상처는 컸다.

처음으로 생산.수출차질을 경험해본 이 회사 노사양측은 메리야스업체의
경쟁상대는 후발개도국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노사분규는 결국 후발개도국에만 좋은 일을 시켜준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후 이 회사에서 노사분규는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노사양측이 서로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가족적
관계를 정착시키게 됐다.

이화선총부부장도 "90년 이후 우리회사의 노사관계는 선진적 면모를
갖추었다"고 말한다.

특히 노동조합이 지난 93년부터 벌인 "새마음 갖기 운동"은 조합원들의
공감을 사는 동시에 회사측에도 자극제가 됐다.

집행부는 "노조가 변해야 회사가 변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조혁신
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인사하기" "청결한 작업장 만들기" "지정된 장소에서만 흡연하기"등
즉시 실천할 수 있는 기초질서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결국 회사측의 호응을 얻어 전사적인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
됐다.

회사측은 이에 제안제도를 활성화해 사원들의 건의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1인당 생산성이 15% 향상된 반면 불량률은 오히려 0%에
가까울 정도로 떨어졌다"는게 황창익사장의 자랑이다.

"가정과 회사에서 언제나 모범적인 백양인이 되자는 운동이지요.

자기 감정을 중시하는 신세대 직장인들이 늘어나면서 기초질서도 무시되고
있는 게 전국 사업장의 현실입니다" 이 운동을 주도한 김위원장의 말이다.

그는 근로자 스스로 품질을 자부할 수 있도록 "무결점 운동"을 펼칠 계획을
갖고 있다.

세계1위 기업목표에 노조가 먼저 힘이 되겠다는 얘기다.

물론 회사의 경쟁력향상을 위해 노조가 발벗고 나선 마당에 회사가 가만
있을 수 없다.

회사측은 인건비비중이 높아 경쟁력이 저하될 수 밖에 없는 섬유업종의
경기흐름을 종업원들에게 설명해가며 단기적인 임금인상보다는 복지에 힘을
쏟고 있다.

92년부터 출연한 사내근로복지기금이 현재 47억여원 조성돼있다.

이 기금을 통해 사워들의 주택마련 생활안정 재난구호등을 지원하고 부식
개선 도서실운영 학자금지원등 사업을 벌이고 있다.

주택구입시에 평균 2천만원식 융자해주고 있다.

생활자금도 1천만원 대출해준다.

모두 연7%의 싼 이자다.

노사양측이 구성한 심의위원들이 담당한다.

실제로는 사정에 따라 규정보다 많이 대출해주기도 한다.

기혼사원들의 주택보유율은 그래서 80%를 이미 넘어서있다.

"아마 단체협상 당일 점심시간에 노사대표가 같이 배구시합을 하는 회사는
우리뿐일 것"이라고 박영철공장장은 말한다.

그만큼 서로 믿고 "룰"을 지키는 분위기가 조성돼있다는 설명이다.

내년 창업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량기업의 성장비결을 음미케하는
대목이다.

<전주=권녕설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