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령 원자력연구소원전프로젝트그룹장의 해임으로 촉발된 "한국형경수로
관철위기" 파문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21일에는 한전과 미컴버스천엔지니어사(ABB-CE)가 지난 3월 체결한 양해
각서 내용중 한국형을 담보할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확인돼 "한국형
실종"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한국형경수로의 산파역이자 대북협상과정에서 "한국형및 한국의 중심적
역할"논리를 개발한 주역인 이씨는 그동안 한전이 단독 주계약자가 될 경우
기술을 쥐고있는 미국기업(CE사를 지칭)이 과다한 영향력을 행사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해 왔다.

전력회사인 한전이 기술을 거머쥔 CE사에 이용당할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원연도 주계약자로서 일정부분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왔다.

이같은 이씨의 주장은 그러나 정부와 한전측에 의해 묵살됐다.

특히 주계약자를 맡을 한전은 미국기업이 맡을 프로그램코디네이터(PC)는
경수로가 설계대로 건설되고 있는지를 감독하는 역할일 뿐이라며 과다개입
우려를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씨를 비롯한 원연측 우려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 국내 원전계약체계에서는 기기제작사인 한국중공업의 하청을 받아
원연이 원자로(증기공급장치.NSSS)를 설계토록 돼있다.

그러나 이같은 구조로는 설계자(원연)가 제작사(한중)에 대한 감리를
할수 없어 경수로의 안정성에 문제가 발생할수 있다는게 이씨의 주장이다.

따라서 설계자가 주계약자로 참여, 당초 설계대로 제작됐는지를 철저히
감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와 한전은 대북경수로지원은 당면사업으로 새로운 계약체계
는 혼선을 초래할수 있으며 재조정문제는 장기적으로 검토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공방속에서 계통설계 권위자인 이그룹장이 지난 19일 전격해임되자
원연을 비롯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한국형" 실종위기론이 대두됐다.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핵심기술인 계통설계를 담당할 주인공이 전격경질됐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21일에는 그간 한전이 한국형의 제3국진출을 위한 장치라고
선전하던 CE사와의 양해각서가 당초 알려진 내용과는 다른 것으로 판명돼
"한국형 관철위기론"이 힘을 더해가고 있다.

한전-CE간 문제가 양해각서에서 되는 부분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4조의 "각사는 특정사업에 제3자의 참여를 제의할수 있으며 다른
일방은 이를 합리적 이유없이 거부할 수 없다"는 부분.

이 규정은 사실상 주계약자의 권한인 하청업체 선정권을 CE사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설계등 주요부문에서 CE사가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근거가 될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뚜렷한 이유없이 거부할수 없도록 보장문구까지 포함시켜 놨다.

대북경수로 지원사업에서 CE사가 일정지분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는
양해각서 7조에서도 나타난다.

이 조항에서 양측은 "북한원전사업을 포함, CE사의 공급범위가 울진
3.4호기수준으로 공동참여하는 사업에 대해서는 로열티를 상호부과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

결국 CE사는 울진 3.4호기의 지분(약18%)정도의 참여를 한전으로부터
보장받은 셈이다.

또 한가지 논란을 빚고있는 부분은 이 각서의 서문.

"양측은 현재 한국에 건설중인 1천MW급 가압경수형 원자로의 제3국(북한
포함) 판매시장에 대한 공동참여를 희망한다"는 부분으로 이는 지금껏
확보해 놓은 한국형경수로에 대한 국내기술을 완전무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표준형원자로(KSNP)"라는 표현대신 "1천MW급 가압경수로"로
명기함으로써 CE사가 설계한 "CE80형"으로도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한 원전전문가는 이와 관련, "이 규정은 북한은 물론 그동안 한국형이
수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왔던 중국내 원전도 CE사 모델이 될수 있음을 의미
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이씨 해임에서 비롯된 "한국형및 중심역할"논쟁은 그 불똥이 한전-
CE간 양해각서쪽으로 튀면서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번 각서파문은 한전과 원연간 알력으로 불거진 1라운드와는
달리 논란의 파장이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정욱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