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원전에서 지난달 중순 자연 방사선량의 최고 100배정도에 달하는
방사능이 누출됐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누출된 방사능의 양이 X레이 1회 촬영때 받는 방사선량의 1%밖에 안된다니
불행중 다행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 누출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체에 해가 없었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방사능 누출과정부터 보자.원자력발전소의 핵폐기물은 드럼에 담긴후 임시
저장고로 수송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드럼표면의 완벽한 제염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나 고리의 경우
이 작업을 대충 한뒤 운반하다 폐기물 일부가 바닥에 떨어져 오염이 됐다는
것이다.

지겹도록 들어오던 "대충"이 여기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방사능누출 자체도 문제지만 발견과정에서 사후 처리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처리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다.

방사능물질 오염사고를 알고도 처리완결후 감독관청인 통상산업부에 공식
보고하려다 보니 미처 알리지를 못했다는 한전 관계자의 설명에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통산부에 보고도 되기전에 보도해버린 일부 언론이 잘못이라도 했다는
말인지 궁금하다.

이번에 드러난 문제점은 단순히 안전관리 소홀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한국사회의 큰 문제중 하나로 드러난 "괜찮아" 사고방식이 결정적인 요인
이다.

우선 드럼의 제염작업을 하는 인부들이 작업을 소홀히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운반도중 어떻게 폐기물이 땅바닥에 떨어지겠는가.

고리 원전의 경우 드럼표면에 묻은 오염물질을 닦아내는 제염설비가 없어
인부들이 수건에 아세톤을 묻혀 닦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한다.

방사능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어 인부들이 작업을 대충 해버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가능성을 뻔히 알고있는 한전측이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제까지 그렇게 작업을 해왔지만 방사능이 누출된 적이 없으므로
"괜찮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사실을 확인하고 제염작업에 나섰던 한전측은 여기서도 "괜찮아" 사고방식
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인체에 전혀 해가 없고 오염지역중 오직 6곳만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규제수준을 넘어서는 오염도를 보였을 뿐이니 제염작업을 해버리면 괜찮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직원이나 주민들에게는 알려봤자 괜한 걱정만 하게할테니 알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물론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국에 가동중인 원전이 10기가 있고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정부당국자 말대로 최선을 다해왔던 한국의 원전안전관리가 이
모양이라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래가지고서야 핵폐기물 저장소를 자기고장에 유치할 수 없다는 지역
주민들의 주장을 님비(Not in my backyard)현상이니 이기주의적 발상이니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방사능 누출사고가 없었던 때에도 그 가능성만을 놓고도 완강히 저항했던
지역주민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한전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가며 원전의 안전성을 홍보한다고 해도
이번과 같은 사고 한번이면 그동안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우리나라 전력공급의 상당부분이 원전에서 나오고 앞으로도 원전을 계속
건설해 나간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인 줄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안전관리는 더욱 철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 하나 정도야 괜찮겠지 하는 사고방식이 하나 둘 불법을 묵인해주고
결국은 기네스북에나 오를만한 5층건물 완전붕괴라는 사고를 빚었다.

사망자만해도 500여명에 이르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발생한 것이
엊그제인데 우리는 또 하나의 사고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인명피해가 없었으니 괜찮아, 제염작업도 다 했고 앞으로 과기처에서
낙후된 작업도구도 모두 교체해 준다니 괜찮아, 외국에서도 방사능 누출
사고는 일어나는데 우리는 겨우 이번 한번뿐이니 괜찮아, 기껏해야 책임자
한두명 정도가 문책을 받을테니 실무자들이야 괜찮아, 삼풍사고야 공무원들
이 뇌물받고 불법을 눈감아 줬으니 사법처리 대상이지만 우리야 뇌물받은
것이 아니니 괜찮아, 우리야 공식 보고를 받지 못했으니 책임질 일도 없고
괜찮아, 폐기물저장소를 추가로 건설할때까지는 아직 세월이 많으니 사람들
이 누출사고를 잊을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한전 과기처 통산부관리들이 혹시 있다면 괜찮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