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가경이 희봉에게 잠만 자고 있다고 핀잔을 주는 바람에 희봉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앉고 말았다.

근데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왔다니.

진가경이 지금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저 진가경의 모습은 귀신인가 사람인가.

희봉은 진가경이 비롯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더라고 무섭기는
커녕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지금 그럼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두루 다니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자 진가경이 머리를 천천히 저었다.

"다른 분들께는 인사를 드릴 시간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아주머니에게만 이렇게 인사를 드리러 온 거예요"

"다른 어른들도 많은데 하필 나에게만? 그 이유가 뭐예요?"

희봉은 자못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생전에 나에게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주시고 사랑을 베푸신 그 은혜를
생각하여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관심과 사랑이라면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나야 뭐 해준게
별로 있어야지"

"물론 다른 분들도 나를 무척 염려해주시고 사랑해주셨어요. 하지만
내가 이루지 못한 소원을 부탁할만한 분은 우리 가문에서 희봉 아주머니
밖에 없거든요"

"어떤 소원인데요? 말해보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일생동안
온힘을 다해 이루어볼게요"

희봉은 사뭇 비장한 마음까지 들었다.

"아주머니는 우리 가문의 여자들 중에서 여걸이에요. 사모관대를 쓴
남정네들도 아주머니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아주머니
만이 내 소원을 이루실 수 있어요"

"글쎄 소원이 무엇이냐니까요?"

"아주머니, 이런 속담 기억하시죠? 달이 차면 기울고, 물이 차면
넘쳐버린다는 속담 말이에요.

그리고 높이 오를수록 떨어질때는 더 심하게 다친다는 속담 말이에요"

"그럼 기억하고 말고요. 평소에도 늘 입에 오르내리는 속담인걸요.
그 비슷한 것으로, 즐거움이 지나치면 슬핌이 찾아든다는 속담도
있지요"

"그 속담이 바로 우리 가문을 하는 말이라는 것은 생각해보셨어요?"

진가경이 얼굴에 미소를 거두고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희봉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과연 진가경이 인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아까운 인물이 인생의 꽃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다니.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