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년전, 유학자 회봉 하겸진은 진주의 서실 귀강정사에 들어앉아
"국성론"을 써내려갔다.

"사람이 육신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죽으면 그는 사람이 아니다.

나라도 이와 같다.

국민이 이미 그 본성을 잃어버리고 남의 풍속을 따라가고 있으니 내가
보건대 강토가 비록 회복된다 해도 노예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당시에
이미 독서를 통해 동서의 철학과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회봉은 우리나라의 국성이 "예의"임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무턱대고 버릴것이
아니라 고유한 국성을 확립한 위에 서양열강의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또 남의 문물을 본받아 본성을 잃고 남과 똑같이 되는 것은 문명이
아니라고 적어 놓기도 했다.

해방 이듬해 회봉은 "하늘이 도와 적국이 물러 갔지만 인심이 일치하지
않고 당파만 생겨 하루도 안정될 날이 없으니 한심스럽기만 하다"고 통탄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회봉의 걱정은 적중해 우리는 해방뒤에도 미군정과 6.25를 거치면서
물밀듯 들어닥친 미국식 대중문화에 정신을 빼앗기고 채 정리하지 못한
식민지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아오고 있다.

한마디로 지난 반세기는 경제적으로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감격의
시대"였지만 정치에서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외국문화의 모방에 급급,
우리의 본성을 잃고 허둥대며 달려온 "수난의 시대"였다고 해도 관언은
아닌듯 싶다.

광복50년을 맞는 지금 우리의 사회상을 사회학자들은 울리히 베크의
이론의 틈을 빌려다가 "위기상황"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고전적의미의 위기징후들이 농후하기 때문이알고
설명한 세계화라는 화려한 수사가 무새고한 반인륜적범죄의 증가, 대형
사고의 속출, 집단이기주의의 만연, 부정부패의 확산등이 그들이 지적하는
대표적 위기의 징후들이다.

전통적규범은 무어졌지만 아직 새로운 규범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의
아노미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상이란 말이다.

문명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시련에 선 문명"에서 인류의 수만년 역사에
견주면 문명사 5,000년도 동시대역사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50년이란 시간은 거론할 여지가 없다.

그래도 연대기적인 광복50년을 기념화고 추고하는 까닭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21세기를 준비하는 전국민의
마음가짐을 다지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회봉의 말처럼 1,000년뒤 후손들에게 "봉황새가 독수리가 되기위해 자기의
깃을 뽑아 버렸다"는 비난을 듣지 않도록 우리문화를 창조적으로 가꿔나가는
지혜가 절실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