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직원의 화폐불법유출사실이 사고가 발생한지 1년4개월이
지난 뒤에야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이번에 알려진 화폐유출사고는 지난 6월 조폐공사의 지폐도난사건과
함께 통화신용질서를 뒤흔드는 불법행위로서 엄격한 진상조사와 책임
추궁,그리고 재발방지노력이 요구된다.

오늘날 돈은 모든 경제활동을 매개하고 지급결제하는 수단으로서 화폐
가치의 안정은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특히 화폐가치가 금과 연계됐던 때와는 달리 현재의 관리 통화제도에서는
화폐가치의 안정및 통화신용질서의 유지가 전적으로 정부책임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도 "자본주의붕괴의 지름길은 화폐가치의
추락에 있다"라고 갈파했던 것이다.

하물며 폐기처분되어야할 돈이 멋대로 유출되고 새로 찍은 돈을 내부
직원이 훔쳐낸다면 어느누가 마음놓고 경제활동에 종사할수 있겠는가.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누출된 사고와 같다"는 대통령의 개탄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번 화폐유출사고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 이처럼 중대한 사고가 어떻게 사법당국의 수사도 받지않은채
1년4개월동안이나 은폐됐는가라는 점이 궁금하다.

한은 부산지점 서무과직원인 김모씨가 지난 93년12월과 94년4월
두차례에 걸쳐 1만원권 55장을 빼돌렸다가 적발된 것이 사건의 전부
라고 믿을수 있을까.

불법유출된 금액과 유출횟수가 더 없는지,그리고 다른 가담자나
조직적인 비리는 없었는지 장담할수 있는가.

현장조사도 변변히 않은채 관련직원 7명을 경징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한은의 사건처리는 중앙은행의 막중한 책임을 잊고 사건당사자로서 최소
한의 수습노력마저 게을리한 직무유기행위다.

한은 뿐만아니라 업무감사권을 가지고 있던 당시 재무부및 감사원도
책임을 면할수 없다.

재무부감사관실은 사고발생 며칠뒤인 지난해 5월2일 서면보고를 받고
감사원에 통고했을 뿐 장관에게는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는데 이는 상식
적으로 전혀 납득할수 없는 일이다.

또한 아무리 실권없는 "통과위"라고 하지만 구두보고를 받은 금융통화
운영위원회는 무엇을 했으며 감사원은 왜 감사를 하지 않았는지도 궁금
하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터인지 사고만 나면 "좋은 일도 아닌데 덮어두자"
라는 무사안일한 의식이 팽배해 있으며 조직을 위한다는 핑계로 책임
회피와 자리보전에만 급급한 실정이다.

이러니 철저한 진상파악및 체계적인 재발방지노력은 처음부터 기대할수도
없는 일이다.

이같은 병폐는 평소에는 중앙은행독립이다,통화신용정책의 일원화다
하며 밥그릇싸움에 열을 올리다가도 책임질 일이 생기자 발뺌에 바쁜
이번 사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정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관련자들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하며
조직내부나 제도적인 허점은 없는지도 철저히 조사하여 국민경제질서와
국가기강을 뒤흔드는 이런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