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채동선(1901~53)은 한민족 고유의 정서를 서양문학의 기법에
담는데 크게 기여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이자 민족주의문학의 개척자다.

그의 문학혼은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고향"에서 잘 드러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래요/산꿩이 알을 품고
/뻐국이 제 철에 울건만."

이 가곡에는 나라를 잃은 깊은 설움이 은유된 가사의 내용처럼 민족
고유의 강한 서정성이 깃든 선율이 넘쳐 흐른다.

그가 남긴 100여편의 작품에서 그의 이같은 민족적 문학혼은 일관되게
이어진다.

일제치하에서 작곡된 "향수" "압천"등 가곡과 합창곡 "새야 새야
파랑새야", "뱃노래"등 편곡민요에서 해방뒤 작곡된 "조국" "독립축전곡"
"하낭수"등 교성곡과 "개천절노래" "3.1절노래" "선열추모가"등 국경일노래
에 이르기까지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행적 또한 문학세계와 일치했다.

일제치하에서도 대학을 나오고 해외유학을 한 개화된 지성인이면서도
양복이 아닌 한복을 즐겨 입었다.

일제말기에 많은 음악인들이 친일행위를 저지르고 있을때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문학활동을 중단한뒤 서울 성북동에 은거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그때 "춘향가"등 판소리와 "육자배기"등 민요의 채집에 심혈을 기울여
그의 창작 못지 않은 값진 유산을남겨놓았다.

그의 학력을 보면 전남 보성의 부호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제일고교
재학중 3.1운동 가담으로 중퇴를 한 뒤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가 음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제일고교재학때 바이얼린을 취미로 시작한
때였다.

대학재학중에도 음악수업을 계속하여 졸업을 한 1924년에 바이얼린독주회를
열기까지 했다.

그는 곧바로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의 쉬테르쉔음악학원에 입학하여
바이얼린과 작곡을 공부햇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전에서 잠시 음악강의를 하다가 물러난 뒤로는
후진들에게 바이얼린과 작곡을 개인지도하면서 세차례의 독주회도 가졌다.

해방뒤에는 작곡에 전념하는 한편 고려음악협회장 작곡가협회장
국립국악원이사 예술원회원등으로 현실에도 적극 참여했다.

평생동안 연주료나 작곡료를 한번도 받아본적이 없는 그는 끝내 6.25부산
피난중 생활고에 시달려 복막염으로 생애를 마감했다.

서양음악을 전공했으면서도 서양음악의 틀에 민족음악혼을 담는데 그의
참뜻을 새삼 깨닫게 한다.

모쪼록 그의 참뜻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채동선의 우월이 되었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