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대도시들로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본보기를 들라면
단연 로마와 파리를 꼽을수 있다.

현대의 거대도시로 발전되면서도 옛모습을 간직해왔기 때문이다.

로마의 구시가지는 고대 도시부분의 거의가 폐허가 되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전통적인 경관을 유지하기위해 건축이 엄격히 규제되어
왔다.

또 극심한 교통혼잡에 시달리면서도 르네상스기와 바로크시대에 이루어진
도로망을 그대로 고수해 왔다.

그것이 오늘날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실증이 되고 있다.

파리 역시 옛 성벽의 자취를 따라 만들어진 환상도로(36 )에 둘러싸인
구시가지에 7~8충 이상의 건물이 들어서지 못하게 규제해 왔다.

프랑스의 제2 제정기인 1860년 이후에 이루어진 모습이 지금의 구시가지다.

그때 "추한 것까지도 매력으로 변하게 하는 고도"라고 한 샤를 보들레르의
찬상이 깃든 파리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뚜렷하게 나눠놓은
도시의 전형이 있다.

터키의 앙카라다.

1923년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긴 케말 파샤정부는 2년뒤
구시가지 남쪽에 신시가지건설을 시작했다.

한때 구시가지의 훼손이 있었으나 그것을 복원시키는 강력한 정책을
펼쳤다.

그것이 길이 좁고 집이 밀집되어 있긴 하지만 비잔틴시대 이후의 앙카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게 해주었다.

"600년 고도"라고 자랑해온 서울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들이다.

500년의 향취라고 해 보아야 빌딩들의 숲에 묻힌 몇몇 고궁들에서나
찾아질수 있다.

한국에서 그런대로 고도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곳은 경주뿐이다.

문화관광지 개발이라는 구실로 상처가 날대로 난 것이긴 하지만 유일하게
많은 유적이 남아있는 고도다.

그런데 근간에 경주에 시내관통 고속철도를 놓고 경마장을 만들겠다고
야단들이다.

당국은 대통령선거공약사항을 이행하는 것이고 지역에는 더 많은 관광객의
유치로 수입을 증대시키는 것이어서 언뜻 보아 그럴듯한 이유가 된다.

문제는 그것이 고도의 원형을 크게 훼손하고 보문관광단지와 같은
위락시설을 만들어 문화유산 본래의 이미지를 말살시켜버리는 무지에 있다.

그것은 곧 야만으로 가는 길목인 것이다.

관광산업대국들인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고도 보존선례를 한번쯤
심사숙고해 보는 예지가 필요한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