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설계 전문회사 설립을 둘러싸고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정부 부처.
기관간의 싸움을 보고 있으면 정책담당자들이 낡은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케 된다.

한심하게도 해당 기관들은 싸움의 본질에서 벗어나 언론을 통해
허위사실까지 유포해가며 주도권다툼을 벌이는 추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

원전설계를 둘러싼 한전-원자력연구소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갑자기 이같은 갈등이 악화된 것은 국내 원자력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대북 경수로지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원자력
설계전문회사 설립이 추진되면서부터다.

한전과 원연은 제각기 이 신설회사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며 이같은
주도권싸움은 어이없게도 이들 두 기관의 후견인 격인 통상산업부와
과기처 수뇌급들의 감정싸움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양측의 주장은 나름대로 그럴만한 근거를 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원전설계에서는 계통설계가 사람의 뇌에 해당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계통설계를 맡아온 원연이 신설 설계전문회사를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런가하면 지난 92년 원자력위원회가 원연의 설계업무를 한전측에
넘기도록 한 결정을 존중해 한전에 설계업무가 이전되는 형태로 공동
자회사가 설립돼야 한다는 주장도 충분한 현실적 근거를 갖는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같은 논쟁이 본질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국내 원자력
기술발전을 위해 무익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은 대북 경수로지원사업과 15개월 앞으로 다가온 원전시장
개방이 발등의 불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원칙에 입각해 하루속히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원전설계업무는 일원화돼야 한다.

지금의 원전설계체제는 한전이 종합설계,원연이 계통설계,한중이
부품설계를 따로따로 맡는 이른바 역할분담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분할체제로는 원전산업의 경쟁력제고와 수출활성화가
어렵다.

둘째 새로운 전문업체는 한전과 민간기업을 주축으로 설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내 원자력기술발전에 원연의 공이 큼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연구소의
본래 기능은 사업이 아니다.

연구성과를 되도록 빨리 산업체에 이전해주는 것이 연구소의 역할이자
보람일 터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한전을 배제한 새 원자력기술회사 설립계획을
발표해 물의를 빚은 신재인 원자력연구소장의 발언은 너무도 현실성이
결여돼 황당하기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한전과 원연간 주도권다툼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의 고위 조정기능이 신속하게 발휘되는 것이 좋겠다.

공청회 참여조차 한쪽에서 꺼려할 정도로 감정이 악화된 상태라면
당사자들에게 맡겨 놓고 구경만 할 일이 아니다.

원연의 기술자립의지를 존중하되 한전및 민간업계의 원전설계사업
의욕을 북돋우는 방향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