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골프매거진이라는 잡지에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던
닉 프라이스가 턱을 괴고 갯바위에 앉아 상념에 젖어 있는 사진이
실려있었다.

필자는 그 사진을 보았을 때 왠지 남의 일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기사를 다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요즘 필자가 잘 아는 B 프로가 슬럼프에 빠져있다.

물론 그의 슬럼프는 몇해전부터 이어져 온 그의 생활의 불충실함에서
기인될 것이다.

어떤 이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이제 밥먹고 살만하니 게을러진 것
아니겠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필자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그는 필자가 아는 어느 선수 못지 않게 성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슬럼프는 그를 온갖 구설수에 오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골프에서의 슬럼프는 짧게는 3개월의 텀으로
오는 것 같다.

더욱이 그 슬럼프는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빗나가다가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다.

그때쯤에 이르러서는 도대체 스윙의 기초마저 잃어버린 듯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골프채도 바꾸고 싶어질만큼 담담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회복도 서서히, 아주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였었다.

필자는 골프를 하면서 슬럼프를 맞았다가 헤어나오고 함을 되풀이
하면서 경기순환에 관한 경제이론을 떠올리며 슬럼프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쳐 보곤 한다.

또한 골프경험이 축적되면서부터는 슬럼프에 빠지지 않으려고
고시공부할 때의 어느 선배 말씀을 새삼 생각하고는 그를 실천에
옮기려고도 노력했었다.

그 선배는 자신은 공부하기 싫은 때가 없었는데 그것은 약20여일
열심히 공부하고 나면 공부하기 싫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미리 놀다
오곤 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지난 한동안 또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8월초 그립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니만 스윙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슬럼프가 찾아 온다는 생각이 들어 골프채를 놓고 3박4일동안 산행을
다녀왔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에도 골프를 생각해서 손목이나 팔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었는데도 돌아와 보니 골프는 울고 싶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집착하면 안된다 싶어 나름대로 큰 결심을 했다.

즉 한동안 연습장에도 가지말고 골프채도 손에 잡지 않은채 이미지
트레이닝만 하자는 다짐이었다.

10여년을 하루같이 다니던 연습장에 가지 않으려니 아침마다 좀이
쑤심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동안을 보내다 어제 아침 연습장에 가보니 스윙이
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필자는 B 프로에게 늘 너무 볼을 잘치려 연습만하지 말고 선배프로들이
써놓은 책을 읽으며 수양하기를 권했었다.

물론 닉 프라이스가 슬럼프에서 헤어 나왔었다는 경험담도 들려줬다.

그리고 덧붙인다.

슬럼프는 골퍼인 당신을 더욱 성숙되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시험이라고.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