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도입기의 러시아에서 가장 큰 혜택을 누린 계층은 은행가이다.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 거리에는 고급승용차에 우아한 여자친구를 태우고
또 사설경호원까지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띈다.

바로 은행가들이다.

이런 러시아 은행가들이 요즘 금융시장경색으로 혼쭐이 나 있다.

돈을 벌 수있는 구석이 막혔을 뿐만 아니라 여론도 그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경제의 동맥인 은행이 파산위기에 놓여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내자는
여론이 일어야 하는데 이 참에 부실은행들은 없어지는게 낫다는 목소리가
오히려 더 높다.

러시아 은행가에는 이미 올해초부터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 불길한 예감은 역설적으로 러시아 경제의 병폐들이 하나하나 개선되어
갈 때마다 더 증폭됐다.

치솟는 물가,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 루블화 폭락, 산업생산활동
의 저하 등이 모두 은행들로서는 적절한 사업환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전국에 걸쳐 2,500개가 넘는 러시아 은행들은 지난 4년여동안 루블 가치가
급등락할 때 환투기를 일삼아 떼돈을 벌고, 통화와 물가불안이 가중되면
정부로부터 쉽게 꾼 돈으로 이러저리 고리채를 굴려 덩치를 유지해 왔다.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새로 돈을 찍어내 은행을 주면 이 돈은
산업현장의 만성적 자금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투기자금으로 전용됐다.

이런 악순환에 러시아정부가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한게 바로 은행들에
비극의 출발이었다.

중앙은행은 시중은행의 지불준비율을 높이고, 경화보유액중 일정비율을
중앙은행에 의무적으로 예치하도록 지시하는 등 강력한 금융긴축에
들어갔다.

때마침 수출경기가 늘어나 외환보유고가 어느정도 넉넉해지자 재정적자폭도
급속히 둔화됐다.

이를 바탕으로 무분별하게 통화를 남발하는 것도 자제, 은행들이 손만
벌리면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루블화도 점차 줄어들었다.

러시아정부의 이같은 긴축기조는 지난 1월 17%선이던 인플레율이 8월에는
4.5%로 낮아지는 등 물가고가 뚜렷이 진정되는 가운데서 안정성장을 정착
시키는 계기가 됐다.

중앙은행은 이와함께 기축통화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달러에 대한
루블화의 변동폭을 지난 7월6일부터 10%로 제한, 대외적으로도 러시아경제의
안정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그러나 러시아은행들에 정부의 이같은 경제정책은 수익원을 고갈시키는
것과 다름없었다.

중앙은행으로부터,또는 다른 대형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할 만큼
재무구조가 악화된 은행들이 속속 늘어갔다.

지난 4월경부터 러시아에서는 "은행을 세우기 위해 은행강도를 하는 것만큼
바보스런 짓은 없다"는 말이 유행할 만큼 시중은행들의 부실화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7월에는 러시아 은행연합회가 부실채권 때문에 전국에 582개의 은행이 문을
닫게 됐다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지원을 호소했으나 재무부나 중앙
은행의 반응은 냉담했다.

급기야 지난 8월 24,25일 이틀동안 은행간 금융시장에서 대출금리가 500%
까지 치솟고, 일부 은행들은 고객들의 예금인출이 폭증해 업무가 마비되는
등 금융대란이 일어나게 됐다.

은행파산설이 파다한 가운데서 타티아나 파라모노바 중앙은행총재대행이
루블화 변동폭제한을 올연말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한게 금융대란의 도화선
이었다.

일단 중앙은행이 환매채매입과 단기자금대출의 방법으로 대형상업은행에
1조6,000억 루블을 긴급수혈, 급한 불은 잠재웠으나 아직까지는 불씨가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 어렵다.

이같은 상황에서 러시아 재무당국은 현재 두가지의 기로에 서있다.

하나는 진정제를 놓는데 그치지 않고 은행들의 요구대로 종합적인 구제
방안을 내놓는 것이다.

이 경우 지난 수개월동안 추진해온 금융긴축정책을 포기해야 하고, 또다시
세자리수의 물가고를 감수할 수 밖에 없다.

러시아내 서방경제전문가들은 이미 2.4분기 총통화증가율이 46%에 달해
올가을 물가에 비상이 걸려있는 상태에서 이런 조치를 내놓을 경우 엄청난
후유증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보리스 옐친대통령 역시 은행들이 무더기로 문을 닫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정부재정을 덜어내면서까지 은행들을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다고 못박았다.

또 다른 선택은 은행들에 자본주의의 적자생존논리를 습득하게 해주는
것이다.

논리적인 접근이라면 당연히 이 선택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올12월로 예정된 총선과 내년 여름의 대통령선거가 아무래도
러시아 재무당국자들에게는 부담스런 존재다.

< 박순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