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인은 여러 부인들 중에서 서열을 따라 형부인과 왕부인,우씨 세명만
데리고 궁궐로 향했다.

희봉도 같이 가보고 싶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회가 있을지 어떨지 모르지만.부인들을 태운 네개의 가마가
영국부정문을 황급히 빠져나가고 난 후,가사와 가진도 가용,가장들을
데리고 궁궐로 향하였다.

그들은 각자 자기 신분에 맞게 예복들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녕국부와 영국부 두 집에서는 상전이건 하인이건 남녀노소 바깥채
안채 구별없이 모두 기뻐서 덩실덩실 춤들을 추기도 하였다.

"가정 대감 생일날에 이 또 무슨 경사란 말인가!"

"황제 폐하 만세! 우리 현덕비 만세!"

희봉은 기쁨의 소용돌이가 이는 그 와중에서 문득 진가경이 죽을 때
혼령으로 나타나 들려준 말들이 기억났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집안에 비상희사(비상희사)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바로 이 기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그 때 진가경은 이 일을 가리켜 뜨거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고
하였고,비단에 아름다운 꽃을 수놓는 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편으로 성연필산(성연필산),즉 아무리 성대한 잔치도 반드시
끝나게 마련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집안 사람들은 갑자기 닥친 영화에 기뻐 날뛰고 있지만 이 영화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희봉은 진가경의 예언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기쁜 것을 어떡하나.

희봉도 웃음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고 다른 부인들과 함께
왁자지껄 떠들며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희봉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가셨다.

저쪽 회방원 담 모퉁이에서 진종과 어느 여자가 다른 사람들이 볼세라
몸을 웅크리고 은밀히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변장을 하였지만,희봉은 그 여자가
수월암 정허 스님 밑에 있던 지능임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아니,저 애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어? 지난번 수월암에서 며칠 묵을
때도 진종과 지능이 서로 주고 받는 눈길이 심상치 않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

불길한 예감이 희봉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능을 잡아 혼을 내주어야겠다고 하인을 부르려고 하는데, 어느새 그
둘이 회방원 담을 돌아 사라져버렸다.

이것들이 어디 갔나 하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희봉은 진종의 문제를 진종의 아버지 진업을 만나 의논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늘 진종과 친밀하게 지내는 보옥이 진종에게 물들까 염려스럽기도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