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애기도 지워지겠죠"

지능이 참담한 어조로 중얼거린 말이 혼미한 진종의 귓가에 자꾸만
환청으로 들렸다.

지능이 죽으면 안돼. 죽으면 안돼. 진종이 속으로 안타깝게
부르짖었지만, 어느새 지능이 목을 맨 모습이라든지 낭떠러지에 떨어져
머리가 깨진 모습들이 어른거렸다.

어떤 때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애기의
모습이 진종의 눈앞에 붕긋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애기는 진종을 닮아 얼굴이 둥그스름하였고 지능을 닮아 두 눈이
또렷하였다.

애기는 방실방실 웃으며 손짓까지 하였다.

진종은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머금다가 그 애기도 지능과 함께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지는것 같았다.

보옥은 진종이 앓아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울적하여 견딜수
없었다.

원춘 누나가 황제 폐하의 후비가 되었다는 소식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기뻐하지 않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냈다.

주위 사람들이 보옥에게, "국구전하가 되셔서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다니세요?"라고 농담삼아 말을 걸어보아도 보옥은
대꾸도 하지 않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국구전하란 황제의 처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보옥에게 들려왔다.

희봉의 남편 가련이 대옥을 데리고 양주땅으로 내려갈 때 몸종으로
함께 갔던 하인이 영국부로 돌아왔다.

"내일 가련 대감님이 돌아오십니다. 저보고 길을 재촉하여 먼저 가서
소식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가련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희봉이 희색이 만면해졌다.

"대옥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내일 같이 오는가"

보옥이 하인에게 숨이 넘어갈듯 급히 물었다.

"물론입죠. 대옥 아가씨도 가련 대감님과 함께 오십니다"

그러자 그동안 우울하던 보옥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대옥 아가씨뿐만 아니라 가우촌 대감도 같이 오십니다. 이번에
장안으로 와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장안 성내에서 직책을 맡게될
것이라고 합니다.

왕자등 대감 어른이 천거를 한 덕택이라면서 가우촌 대감이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보옥의 외삼촌 왕자등이 왕부인의 청을 받아 가우촌에게 설반의
살인사건을 잘 무마해달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며 부탁을 하였고
가우촌이 양심에 꺼리지만 감히 그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들어주었기
때문에 이번에 혜택을 입게 된 셈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