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말 영국인들은 또한번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가 자국의 머천트뱅크 스미스뉴코트(SNC)를 인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90년대초부터 미국 투자은행들이 런던증시에서 고객을 앗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온 터였다.

지난 3월에는 베어링은행이 파생상품거래 잘못으로 파산, 네델란드 ING로
넘어가는 것도 지켜봤다.

메릴린치가 SNC를 인수하기 10여일전 독일 최대은행인 도이치은행은 런던에
국제투자금융업무 전진기지를 구축했다.

89년 인수한 영국 머천트뱅크 모건그렌펠과 자사의 투자금융부문을 합쳐
도이치모건그렌펠(DMG)을 만든 것.

물론 도이치은행의 투자금융본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런던으로 옮겨갔다.

최근의 이 두가지 변화는 미국.유럽 은행들이 펼치는 투자금융 공방전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투자금융업을 강화하려는 유럽은행들과 아성을 굳히려는 미국 은행들간의
싸움은 지금 런던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투자금융이란 한마디로 증권업이다.

기업이 주식이나 채권을 발행, 자금을 조달하려면 투자은행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투자은행은 증권을 매입하거나 자기책임하에 인수, 투자자들에게 판매함
으로써 수수료나 차익을 챙긴다.

민영화나 기업 인수.합병(M&A) 관련업무도 이들의 몫이다.

기업들이 은행창구보다는 직접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경향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국영기업 민영화가 불가피하고 아시아.중남미에서는
사회간접자본 확충이 시급하다.

그만큼 투자은행들의 일감도 풍성해졌다.

미국.유럽 은행들이 투자금융 공방전을 벌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투자금융업에 관한한 미국 투자은행들이 단연 으뜸이다.

인수업무의 경우엔 전세계 수요의 7할을 차지한다.

유럽에서는 미국 투자은행들과 비슷한 영국 머천트뱅크들이 앞서 있다.

유럽 대륙에서는 전통적으로 유니버셜뱅킹(은행.증권 겸업)을 고수해
왔지만 직접금융은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다.

미국.유럽 은행들간의 경쟁이 런던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유럽 은행들은 자금력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는 영국 머천트뱅크를 인수,
노하우를 전수받음으로써 미국 투자은행들에 맞서려 한다.

반면 미국 은행들은 런던을 장악하면 유럽시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투자금융업을 강화하는 유럽 은행들의 투지는 매우 강하다.

도이치은행의 경우 DMG 설립을 계기로 미국 투자은행들에서 전문가들을
대거 스카웃했다.

경쟁상대인 메릴린치에서 아예 팀을 통째로 데려오기도 했다.

이 은행의 목표는 금세기말까지 세계 5위 투자은행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도이치은행 뿐이 아니다.

유럽의 큰 은행들은 대부분 미국 투자은행들과 한바탕 싸울 채비를 하고
있다.

독일 드레스너은행은 지난 6월 영국 머천트뱅크 클라인보르트벤슨을 인수
했다.

한달전인 5월에는 스위스은행(SBC)이 영국 최대의 증권회사인 SG워버그를
사들였다.

현재로서는 미국 기업들이 해외에서 가장 많은 증권을 발행한다.

그러나 5년후엔 유럽이나 아시아.중남미가 더 많은 증권을 해외에서 발행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유럽 은행들의 투자금융업 진출은 미국 은행들로부터 유럽시장을 방어함과
동시에 개도국시장에서 많은 일감을 따내기 위해서이다.

유럽은행들은 벌써부터 다소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

미국 통신회사 AT&T는 유러달러채 발행업무를 도이치은행 스위스은행
UBS(스위스) 등 유럽은행들에게 맡기고 있다.

세계은행은 지난 12일 남아프리카에 제공할 수력발전소 건설자금 12억
5천만달러 기채업무를 미국의 모건스탠리와 경합한 독일 DMG에 맡겼다.

7월에는 영국의 바클레이은행 자회사인 BZW가 미국의 르만브라더스
살로먼브라더스 JP모건 등을 제치고 이탈리아 통신회사 STET 민영화를
담당할 주간사은행으로 선정됐다.

전문가들은 미국.유럽 은행들이 "치열한 장기전"을 펼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머잖아 눈물을 흘리는 은행도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 김광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