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봉은 조노파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할멈의 두 아들을 이번에 황제 폐하의 후비를 맞기 위해
지을 별채 공사에 써달라는 것이죠? 어디 별채 공사 뿐이겠어요?

후비 앞에서 공연할 극단도 모집해야 하고. 할 일들이 많이 있겠죠.
그런건 할멈의 아드님이 돌아오시면 잘 부탁드려봐요"

희봉이 슬쩍 가련에게로 그 일을 떠넘겼다.

"전에도 여러번 부탁드렸는데,워낙 바쁘신지 우리 아들놈들 돌아보실
틈은 없나 봅디다"

조노파가 돼지고기 안주 중에서 부드러운 부분을 골라 손으로 집어
앞이빨로 조금 베어물었다.

조노파는 그걸 씹는 데도 온 입술 근육을 움직이며 애를 썼다.

희봉은 문득 사람이 늙는다는 사실이 서글퍼졌다.

나도 정신없이 세월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백발이 찾아오고 이빨들이
빠지고 저 할멈같이 되겠지.

희봉은 자신의 통통한 손등을 바라보며 이것도 쪼글쪼글해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오늘밤 가련과의 뜨거운 방사가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한참 지나서야 가련이 상기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들뜬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원래는 황제 폐하께서 태상황마마와 황태후마마에게 후비의 친족들이
입궐하여 후비를 면회할 수 있도록 하는게 어떻겠느냐고 아뢰셨던
모양이야.

그런데 태상황마마와 황태후마마께서는 한걸음 더 나가셔서, 입궐
절차나 면회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하니 아예 후비들을 친정집으로
얼마간 보내어 성친하고 오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거야. 이 망극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가련과 희봉, 조노파가 다시금 감격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가장의 음성이
들렸다.

가련이 문을 열어 보니 가장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웬일인가?"

"지금 당장 극단을 모집하러 고소땅을 다녀오라는 분부를 받아서 떠나는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 후비 앞에서 공연할 극단 말인가? 그런데 벌써 떠나다니.
그것도 이 저녁 나절에"

가련이 가정 대감의 불같은 성미는 알아주어야 한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은 전부터 극단을 새로 모집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이번 경사가 났으니 어차피 서두르는게 낫죠. 그런데
저랑 같이 동행할 사람이 두명 필요한데 어디 믿을 만한 사람 없을까요?"

희봉과 조노파의 시선이 급하게 부딪쳤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