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가사람들] (82) 주가예측 전문가 <3>..증권분석 대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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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고 탈 많은 증권사 조사분야에서 20년이상 종사한 증권맨들은 몇명
안된다.
워낙 증권사가 풍파가 심한 곳인데다가 조사업무의 핵심이 귀신도
맞출수 없다는 주가예측인만큼 적중률이 업계 평균치를 밑돌 경우
배겨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증시 전망을 주특기로 고위직에 오른 대우증권의 심근섭전무(55),
한진증권 류인채전무(54),신영증권 정종렬상무(46)등을 증권분석의
대가로 손꼽아도 지나친 평가는 아닐 것이다.
주가가 한창 좋을때 비관적인 전망을 소신있게 내놓거나 주가가 바닥에
있을때 "상승국면이 눈앞에 왔다"고 선언하는 증권분석가는 드물다.
이같은 현실에서 대우증권의 심전무야말로 "청개구리식" 예측을 용기있게
시도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식시장이 단군이래의 활황을 맞았던 지난 88년 10월.그는 대우증권
주보의 "최근의 증시동향"에서 국내 증시가 <>금융긴축 본격화 <>기업
채산성악화 <>세계주식시장의 하락세 반전등에 따라 하강국면으로 전환,
앞으로 1-2년간 침체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88년 6월9일 738포인트에서 10월 6일 677포인트까지 떨어졌던
종합주가지수는 연말에는 907.20,89년 4월1일에는 1077.77까지 폭등했다.
그뒤에야 폭락장세가 시작됐던만큼 하락 전망이 6개월 빨랐던 셈이다.
지난 63년 증권거래소부터 조사업무를 맡아왔던 심전무는 지난 81년
5월과 지난 91년 7월에도 각각 신문기고를 통해 "만일 80년대 우리
주가모습이 일본과 같다면(종합주가)지수는 88년에 650포인트,91년초에는
37% 반락한 400포인트가 된다" "국내증시가 일본 미국등의 주가평균
회복기간을 따른다면 90년 9월 저점부터 24.3개월뒤인 92년 9-10월경에는
전고점인 1000포인트를 회복할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88년 평균종합주가지수가 693.14포인트로 그의 예상에
근접했지만 91년 연초와 92년 최고치는 각각 679.75포인트,691.48
포인트로 다소 차이를 보였다.
한진증권의 류전무는 지난 73년 입사한뒤 업계 최초로 주보를 제작했고
74년부터는 다른 증권사와 함께 정보회의체 모임인 "화요회"를 창설했다.
세칭 "정보맨"의 효시였던 셈이다.
그는 74년 주보부터 투자유망종목옆에 PER를 함께 기입했지만 증권투자
수준상 그당시에는 별로 활용되지 않았다.
류전무는 구로공단의 비포장길을 다니며 수집한 기업탐방자료를 미국
일본등에서 도입한 주가이동평균선등을 이용한 기술적.기본적분석으로
투자유망종목을 추려냈다.
"70년대 중반 정보회의체의 추천종목인 전자와 건설주를 주보에 실은뒤
예상대로 주가가 큰 폭으로 올라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70년대말이후에는
각종 정치적 격변으로 애써 만든 중장기 예측이 벗어나는 일도 많았다"
(류전무)
지난 76년 신영증권에 입사한 정상무는 지난 84년부터 금리하락및
경기바닥국면 탈출등을 근거로 주가 대세상승을 예상했다.
이에따라 회사측은 85년부터 86년까지 외부자금등을 차입,당시 자본금
80억원을 크게 넘는 1백50억원어치의 주식을 고유계정으로 사들였다.
주가는 86년부터 상승했으며 뒤늦게 증권당국이 증권사 상품보유한도를
설정, 87년부터 초과분을 가능한 천천히 매도하면서 2-3배의 평가익을
낼수 있었다.
"88년이 되면서 주가수준이 겁이 날 정도여서 직원들에게 주가천장론을
강조했지만 그뒤에도 1년가량 더 올라 곤혹스러웠다"(정상무)
그는 또 "그간 대세상승및 하락국면을 60%정도 맞췄지만 정작 영업부서
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단기 종목별 예측에 있어서는 적중률이 고작
20-30%에 머물렀던 같다"고 토로,증권분석업무의 어려움을 실감케 해주고
있다.
<최승욱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1일자).
안된다.
워낙 증권사가 풍파가 심한 곳인데다가 조사업무의 핵심이 귀신도
맞출수 없다는 주가예측인만큼 적중률이 업계 평균치를 밑돌 경우
배겨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증시 전망을 주특기로 고위직에 오른 대우증권의 심근섭전무(55),
한진증권 류인채전무(54),신영증권 정종렬상무(46)등을 증권분석의
대가로 손꼽아도 지나친 평가는 아닐 것이다.
주가가 한창 좋을때 비관적인 전망을 소신있게 내놓거나 주가가 바닥에
있을때 "상승국면이 눈앞에 왔다"고 선언하는 증권분석가는 드물다.
이같은 현실에서 대우증권의 심전무야말로 "청개구리식" 예측을 용기있게
시도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식시장이 단군이래의 활황을 맞았던 지난 88년 10월.그는 대우증권
주보의 "최근의 증시동향"에서 국내 증시가 <>금융긴축 본격화 <>기업
채산성악화 <>세계주식시장의 하락세 반전등에 따라 하강국면으로 전환,
앞으로 1-2년간 침체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88년 6월9일 738포인트에서 10월 6일 677포인트까지 떨어졌던
종합주가지수는 연말에는 907.20,89년 4월1일에는 1077.77까지 폭등했다.
그뒤에야 폭락장세가 시작됐던만큼 하락 전망이 6개월 빨랐던 셈이다.
지난 63년 증권거래소부터 조사업무를 맡아왔던 심전무는 지난 81년
5월과 지난 91년 7월에도 각각 신문기고를 통해 "만일 80년대 우리
주가모습이 일본과 같다면(종합주가)지수는 88년에 650포인트,91년초에는
37% 반락한 400포인트가 된다" "국내증시가 일본 미국등의 주가평균
회복기간을 따른다면 90년 9월 저점부터 24.3개월뒤인 92년 9-10월경에는
전고점인 1000포인트를 회복할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88년 평균종합주가지수가 693.14포인트로 그의 예상에
근접했지만 91년 연초와 92년 최고치는 각각 679.75포인트,691.48
포인트로 다소 차이를 보였다.
한진증권의 류전무는 지난 73년 입사한뒤 업계 최초로 주보를 제작했고
74년부터는 다른 증권사와 함께 정보회의체 모임인 "화요회"를 창설했다.
세칭 "정보맨"의 효시였던 셈이다.
그는 74년 주보부터 투자유망종목옆에 PER를 함께 기입했지만 증권투자
수준상 그당시에는 별로 활용되지 않았다.
류전무는 구로공단의 비포장길을 다니며 수집한 기업탐방자료를 미국
일본등에서 도입한 주가이동평균선등을 이용한 기술적.기본적분석으로
투자유망종목을 추려냈다.
"70년대 중반 정보회의체의 추천종목인 전자와 건설주를 주보에 실은뒤
예상대로 주가가 큰 폭으로 올라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70년대말이후에는
각종 정치적 격변으로 애써 만든 중장기 예측이 벗어나는 일도 많았다"
(류전무)
지난 76년 신영증권에 입사한 정상무는 지난 84년부터 금리하락및
경기바닥국면 탈출등을 근거로 주가 대세상승을 예상했다.
이에따라 회사측은 85년부터 86년까지 외부자금등을 차입,당시 자본금
80억원을 크게 넘는 1백50억원어치의 주식을 고유계정으로 사들였다.
주가는 86년부터 상승했으며 뒤늦게 증권당국이 증권사 상품보유한도를
설정, 87년부터 초과분을 가능한 천천히 매도하면서 2-3배의 평가익을
낼수 있었다.
"88년이 되면서 주가수준이 겁이 날 정도여서 직원들에게 주가천장론을
강조했지만 그뒤에도 1년가량 더 올라 곤혹스러웠다"(정상무)
그는 또 "그간 대세상승및 하락국면을 60%정도 맞췄지만 정작 영업부서
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단기 종목별 예측에 있어서는 적중률이 고작
20-30%에 머물렀던 같다"고 토로,증권분석업무의 어려움을 실감케 해주고
있다.
<최승욱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