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창간31돌] (특별기고) 유동길 <숭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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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길 <숭실대 중기대학원장>
[[[ 경제신문이 해야 할 일 ]]]
아침에는 눈 뜨기 바쁘게 신문부터 찾는건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이다.
더욱이 경제신문을 찾는 독자는 관심의 폭과 깊이가 일반독자와 다르다.
신문에서 세상돌아가는것을 간명하게 알수있고 좋은 아이디어라도
얻는다면 큰 수확이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고 문제를 보는 견해는 서로 다르다.
경제문제치고 이해관계가 엇갈리지 않는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잘못 쓰여진 기사는 결과적으로 어느편의 이익을 대변하게되고
여론을 오도할 가능성은 커진다.
경제정책이 전문가의 의견보다 여론을 보아가며 인기에 영합하는 식으로
결정되면 경제흐름은 왜곡되고 많은 부작용을 남긴다.
신문은 그런 점을 밝혀내야 한다.
기자는 정확한 용어를 구사해야 하고 문제의 초점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해설기사가 무엇을 해설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전문적인 분석을 필요로하는 문제를 놓고 시정사람들처럼 흥분하고
개탄한다.
주장이 논리를 앞서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주장에 유리한 통계만 인용하는 잘못도 서슴지 않는다.
신문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에 바라는 바도 많다.
첫째 경제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경제현안이나 정책결정과 시행에 관한 종합적인 시각의 보도는 올바른
여론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찬반양론을 부각시켜 문제점을 지적하고,누가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할
것이며 국민경제를 위해 어떤 선택이 필요한 것인가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물가가 현안으로 떠오르면 그것만 다루고,무역적자가 문제면 또 그것만
다루고,소비문제가 제기되면 일부계층의 잘못된 소비행태만 지적한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욕구는 물가상승으로 전가된다.
물가안정을 외치면서도 정부도 기업도 근로자와 소비자 모두 물가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째 한국경제문제를 다룰때 외국학자들의 견해를 중시하는 사대사상을
버려야 한다.
외국학자와 전문가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우린 전문가를
뒷전으로 밀어버려서는 안된다.
우리가 제공한 우리의 자료도 한국경제를 분석하는 외국전문가는 그
문제에 관한한 전문가일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셋째 정부의 정책을 크게 다루는 것을 탓할수는 없으나 민간기관의
분석결과나 정책대안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하는 관존민비적
태도는 옳지 않다.
정부가 제공하는 보도자료를 통해 정책 또는 제도의 당위성만 화려하게
부각시키고 시행가능성,집행과정에서 나타날 문제점은 놓친다.
그래서 신문은 결과적으로 정책의 홍보지가 되는 것이다.
넷째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믿음이 강하지 않은것 같고 또 실용적인
것보다 관념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가가 올라도 사고가 발행해도 모두 정부에서 책임을 묻고,그러면서도
정부주도형 경제운영을 비판하기도 한다.
우리의 최대자원은 일하는 손과 생각하는 머리다.
생산형장에서 조금만 정성을 기울여도 무역적자 몇억달러감소는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통계숫자 풀이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준다.
신문은 경제주체들의 행태를 궁극적으로 바꿀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섯째 품위를 잃는 보도태도도 문제다.
정론아닌 가십기사가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그게 형향력을 미친다.
예컨대 어떤 장관은 실세라서 정책집행이 잘될 것이라는 식이 그것이다.
만일 실세여부가 정책집행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를
강하게 비판해야 하는것 아닌가.
그런데도 기자는 이런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쓰고있다.
아직도 오늘의 운세를 싣는 신문도 있다.
몇년생은 어디가면 손해볼것이고 몇년생은 증권에 투자하면 좋다는
식이다.
세상바로잡기, "있어야 할 바람직한 상황"을 만드는 일,이 모든걸
신문이 떠맡을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신문의 역할과 책임은 막중하다.
비난을 무릅쓰고 하는 용기있는 말 한디가 세상을 바꿀수 있다.
경제신문은 경제흐름을 왜곡시키지 않고 성장능력을 키우는 일을
돋우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하면 신문에 그런 색깔이 묻어 나올 것이고 경제주체들은
신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알수있지 않을까.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2일자).
[[[ 경제신문이 해야 할 일 ]]]
아침에는 눈 뜨기 바쁘게 신문부터 찾는건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이다.
더욱이 경제신문을 찾는 독자는 관심의 폭과 깊이가 일반독자와 다르다.
신문에서 세상돌아가는것을 간명하게 알수있고 좋은 아이디어라도
얻는다면 큰 수확이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고 문제를 보는 견해는 서로 다르다.
경제문제치고 이해관계가 엇갈리지 않는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잘못 쓰여진 기사는 결과적으로 어느편의 이익을 대변하게되고
여론을 오도할 가능성은 커진다.
경제정책이 전문가의 의견보다 여론을 보아가며 인기에 영합하는 식으로
결정되면 경제흐름은 왜곡되고 많은 부작용을 남긴다.
신문은 그런 점을 밝혀내야 한다.
기자는 정확한 용어를 구사해야 하고 문제의 초점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해설기사가 무엇을 해설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전문적인 분석을 필요로하는 문제를 놓고 시정사람들처럼 흥분하고
개탄한다.
주장이 논리를 앞서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주장에 유리한 통계만 인용하는 잘못도 서슴지 않는다.
신문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에 바라는 바도 많다.
첫째 경제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경제현안이나 정책결정과 시행에 관한 종합적인 시각의 보도는 올바른
여론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찬반양론을 부각시켜 문제점을 지적하고,누가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할
것이며 국민경제를 위해 어떤 선택이 필요한 것인가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물가가 현안으로 떠오르면 그것만 다루고,무역적자가 문제면 또 그것만
다루고,소비문제가 제기되면 일부계층의 잘못된 소비행태만 지적한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욕구는 물가상승으로 전가된다.
물가안정을 외치면서도 정부도 기업도 근로자와 소비자 모두 물가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째 한국경제문제를 다룰때 외국학자들의 견해를 중시하는 사대사상을
버려야 한다.
외국학자와 전문가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우린 전문가를
뒷전으로 밀어버려서는 안된다.
우리가 제공한 우리의 자료도 한국경제를 분석하는 외국전문가는 그
문제에 관한한 전문가일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셋째 정부의 정책을 크게 다루는 것을 탓할수는 없으나 민간기관의
분석결과나 정책대안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하는 관존민비적
태도는 옳지 않다.
정부가 제공하는 보도자료를 통해 정책 또는 제도의 당위성만 화려하게
부각시키고 시행가능성,집행과정에서 나타날 문제점은 놓친다.
그래서 신문은 결과적으로 정책의 홍보지가 되는 것이다.
넷째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믿음이 강하지 않은것 같고 또 실용적인
것보다 관념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가가 올라도 사고가 발행해도 모두 정부에서 책임을 묻고,그러면서도
정부주도형 경제운영을 비판하기도 한다.
우리의 최대자원은 일하는 손과 생각하는 머리다.
생산형장에서 조금만 정성을 기울여도 무역적자 몇억달러감소는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통계숫자 풀이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준다.
신문은 경제주체들의 행태를 궁극적으로 바꿀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섯째 품위를 잃는 보도태도도 문제다.
정론아닌 가십기사가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그게 형향력을 미친다.
예컨대 어떤 장관은 실세라서 정책집행이 잘될 것이라는 식이 그것이다.
만일 실세여부가 정책집행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를
강하게 비판해야 하는것 아닌가.
그런데도 기자는 이런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쓰고있다.
아직도 오늘의 운세를 싣는 신문도 있다.
몇년생은 어디가면 손해볼것이고 몇년생은 증권에 투자하면 좋다는
식이다.
세상바로잡기, "있어야 할 바람직한 상황"을 만드는 일,이 모든걸
신문이 떠맡을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신문의 역할과 책임은 막중하다.
비난을 무릅쓰고 하는 용기있는 말 한디가 세상을 바꿀수 있다.
경제신문은 경제흐름을 왜곡시키지 않고 성장능력을 키우는 일을
돋우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하면 신문에 그런 색깔이 묻어 나올 것이고 경제주체들은
신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알수있지 않을까.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