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 리스트럭처링(구조재편)이 한창이다.

기업마다 조직을 새롭게 바꾸기 위한 몸놀림에 부산하다.

조직 인사 급여 근무시간 고과기준 등 기업을 움직이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그 대상이다.

리스트럭처링의 여파는 인력 채용분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학력을 묻지 않고,전통적 변별방법이었던 필기시험도 없애는 추세다.

기업내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격변하는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자는 취지에서다.

한마디로 경영의 각 부문에 걸친 "새틀짜기"가 진행되고 있다.

기존 가치체계와 관행을 무너뜨리는 "파괴 바람"을 동반하고 있다.

조직파괴 인사파괴 급여파괴 채용파괴 형식파괴의 열풍이다.

슘페터가 기업 혁신의 요체로 갈파한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가 붐을 이루고 있다.

효율 능률 경쟁력을 모티브로 하는 신사고가 확산되고 있다.

첫째로 조직파괴의 파고가 높아졌다.

파괴의 대표적 병기는 팀제 도입이다.

본부(실)-부-과 라인으로 이어지는 기존 수직적 피라미드형 조직이 파괴
대상이다.

대신 팀제를 중심으로 한 수평조직이 자리잡고 있다.

이에 따라 부하가 직급상의 상관에 업무를 지시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결재라인이 대폭 축소되고 있는 건 물론이다.

삼성전관은 컴퓨터사업부 영업팀의 팀장을 최근 과장급으로 임명했다.

전통적으로 부장급이나 이사급이 맡던 자리였다.

이 바람에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팀에 있다가 승진한 뒤 영업팀에
합류한 부장 차장들이 후배 과장으로부터 업무 지시를 받게 됐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상키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엄연한 "실제 상황"이 됐다.

부.과를 대신해 들어서기 시작한 팀제는 요즘 보다 공격적인 조직파괴의
무기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팀제의 타깃으로 본부(실)단위까지 조준되고 있는 것.본부(실)라는
조직단위를 아예 없애버리고 여러개의 팀 조직으로 분산 관리하는
방안이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

LG전자가 이 방안을 실무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다.

분산 관리를 통한 업무효율 극대화를 향한 몸놀림이다.

"조직파괴 2기"가 도래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로 인사관리 체계에도 혁명적 변화가 일고 있다.

능력만 있으면 연공서열 학력 연령을 따지지 않고 몇단계를 건너뛰어
발탁 승진시키는 신인사제도가 잇달아 채택되고 있다.

대우그룹은 올초 실시한 사장단 인사에서 (주)대우 건설부문 대표이사를
상무급에서 발탁했다.

한화그룹도 비슷한 시기에 이사대우를 계열사 대표이사로 기용했다.

"연공서열 파괴"에 박자를 맞춘 셈이다.

이런 류의 인사파괴가 사장급에만 적용되는 건 물론 아니다.

하위직으로까지 폭넓게 확산되는 추세다.

LG전자는 지난 5월 실시한 정기 인사에서 2년차 차장(3급)을 두단계
건너뛴 수석부장(1급)으로 승진시키는등 무려 60명에게 발탁의 혜택을
줬다.

인사관리는 원래 기업 경영에서 가장 보수적인 부문이다.

그런 곳에까지 스며든 변혁의 물결은 다시 급여체계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두산그룹이 지난해 과장급 이상 전간부를 대상으로 연봉제를 도입한
게 그 대표적 예다.

연봉제란 매년 개인별 업무성적 등을 따져 연공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급여를 정하는 시스템이다.

때문에 과장급에서 1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임원중에서 그 절반도 안되는 급여를 받는 경우도 없지 않다.

현재 연봉제를 채택하고 있는 기업은 20여개사에 이른다.

연봉제의 전단계인 성과급제를 포함하면 벌써 1백개이상 기업이
능력급제를 시행하고 있다.

올들어서만 삼성 한화 포항제철 동양 대림 한보 미원 등 7개 그룹이
전면 또는 부분적인 능력주의로 전환했다.

"연공=호봉 상승"의 원칙을 파기한 것이다. 물론 기업에 따라 호봉파괴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동기는 똑같다. 내부 경쟁시스템을 최대한 가동하자는 것이다.

개방화 세계화시대에 부응할 기업 내부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임직원들 개개인이 "능력 최대치"를 발휘토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급여라는 판단이다.

셋째로 채용시스템에도 "파괴"의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이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올 12월의 신입사원 채용때부터 학력 구분을 전면 철폐키로 했다.

학력 구분만 없앤 것도 아니다.

신입사원 채용의 가장 중요한 그물망이었던 필기시험도 함께 없애기로
했다.

대신 인성 창의력 등을 중점적으로 따지기로 했다.

면접시험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현대 LG 대우 선경 쌍용 등 대부분 주요 대기업그룹들도 같은 변화를
택했다.

도식적이고 형식에 치우친 측면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학력중시"
"필기시험"같은 "앙샹 레짐( ancient regime .구제도)"을 과감히
철폐하기 시작한 것이다.

넷째로 이같은 앙샹 레짐 철폐움직임은 기업 내부를 규율해온 갖가지
형식주의를 타파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제 잔재 군사문화 유물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직장 유니폼을 없애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게 한 예다.

직원들로 하여금 획일화된 근무복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복장을
갖추도록 함으로써 자율과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겠다는 취지다.

"나인 투 식스"로 통칭되는 오전 9시출근 오후 6시 퇴근의 획일적인
출퇴근 시간 적용에도 파괴바람은 미치기 시작했다.

LG전자와 LG화학이 대표적 케이스다.

이들 회사는 임직원들에게 출근시간은 오전 7시부터 10시 사이,퇴근은
오후 4시부터 7시 사이에 자율적으로 정해 실시토록 하고 있다.

"개인별 시차"에 맞추어 출퇴근 시간을 마음껏 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전제는 "하루 8시간 근무요건 충족"이다.

그 요건내에서 출퇴근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있다.

이런 근무시간 자율선택제도는 쌍용정유와 의료기기 업체인 (주)메디슨
등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형식 파괴에는 제한 영역이 없다.

기업 경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인 임직원 인사고과시스템에까지
그 바람이 스며들고 있다.

하급자가 상급자를 평가하는 "상향식 평가"를 한일합섬 LG정보통신
동양SHL 등이 채택하기 시작한 건 하나의 단초일 뿐이다.

상.하급자의 쌍방평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동료들의 평가까지 받도록
하는 "다면 평가"(삼성그룹)를 시행중인 곳도 적지 않다.

한솔그룹은 내친 김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자기 평가제"란 걸 도입했다.

임직원들에게 스스로 자기 능력을 평가해 업무목표를 정한 뒤 이를
상급자에게 신고토록 하는 방식이다.

스스로 심사숙고해 설정한 목표인만큼 목표치에 미달하면 가차없는
불이익이 주어진다.

상여금을 책정하거나 승진.승급기준을 심사할 때 감점을 주는 식이다.

기업들이 이처럼 고과파괴에 다투어 나서고 있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일방적으로 평가해온 기존의 인사고과 방식만으로는
인재 발굴과 능력개발 동기부여 분위기쇄신 등이 쉽지 않다는 "각성"에
따른 귀결이다.

아직까진 기업들의 이런 "파괴 시리즈"가 도입 단계에 불과하다.

때문에 시행초기에 있게 마련인 혼돈과 시행착오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기업 경영의 도도한 물줄기는 기존의 온갖 제도와 관행에 대한
전반적인 재고와 개선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요구하고 있다.

분명한 건 기업들이 다퉈 추진하고 있는 "구습 파괴"는 "창조와 재탄생"을
위한 건설적 파괴라는 점이다.

< 이학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