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대통령 비자금문제가 다시 정치권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민주당의 박계동의원은 19일 노태우전대통령의 비자금 4천억원이 현재
신한 동화은행등 시중은행에 분산예치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
했다.

박의원은 특히 서석재전총무처장관과는 달리 비자금과 관련된 차명계좌
소유자들의 실명과 관련자료까지 제시하고 있어 지난해부터 설수준에 맴돌던
비자금의혹을 한층 구체화시켰다.

이와관련, 민자당의 한 핵심관계자도 이에앞서 "전직대통령 비자금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비자금은 있을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국민회의의
김원길의원과 서석재전총무처장관등에 의해 촉발된 노전대통령의 비자금
보유설이 사실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지난번 국정감사에서 김의원은 노전대통령의 비자금이 일부 대기업 오너의
명의로 차명실명화됐다고 주장, 계좌추적을 요구했으나 홍재형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은 "풍문만으로 조사를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박의원이 구체적인 차명예금주을 밝히게 돼 정부측도 더 이상 의혹
이 증폭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

이날 국회에서 이홍구총리와 안우만법무장관도 일단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확인하겠다는 답변, 금융감독기관이나 검찰의 확인 내지 조사가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만일 검찰의 수사결과 박의원의 주장대로 이 계좌의 주인이 노전대통령으로
밝혀지거나 예상밖의 또 다른 정치권인사등으로 드러날 경우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미칠 파장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일각에서는 민자당의 분해와 정계개편을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박의원의 주장이 이같은 결과로 연결될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다는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박의원의 주장이 사실일지에 대해서도 일부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여권핵심부가 사실을 어느정도 확인했다 하더라도 이를 밝힐지
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박의원의 주장은 하종욱씨의 진술을 근거로 하고있어 하씨가 진술을
뒤엎으면 전체적인 맥락이 크게 바뀔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하씨도 자신의 주장을 은행관계자로부터 들은 얘기라고 말하고 있어
자칫하면 용두사미 격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

또한 비자금을 맡긴 사람이 하씨에게 약7억원의 세금을 물도록 방치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씨에게 사례금을 건네주면서 충분히 무마시킬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의원은 자신의 주장이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결정적인 물증이라고 제시한 신한은행 예금계좌번호 302-3 8-001672의
잔고조회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박의원은 이 계좌를 한단계만 역추적하면 상업은행 효자동지점에 예치돼
있던 4천억원의 경로를 낱낱이 밝힐수 있다며 검찰의 즉각적인 수사를 촉구
하고 있다.

정부의 사실규명의지도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이홍구총리가 법률적인 절차를 거쳐 확인해 보겠다고 한것은 원론적인
답변수준이기 때문이다.

현 여권의 한 실세인 김덕룡의원도 사석에서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실명제에 따라 종합과세하는 선에서 묻어두어야지 수사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의원의 주장이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질지 알수 없으나 이번 사건은
그동안 비자금수사를 꺼려왔던 여권에 치명적인 정치적 상처를 줄 것만은
부인할수 없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만일 검찰이 조사해 비자금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그 사실을 믿을 국민이 몇명이나 되겠느냐"며 박의원의 폭로
자체를 부담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노전대통령측은 이날 박의원의 주장과 관련,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며 "법적 대응" "명예실추"등을 거론하며 적극 대응에 나서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 김태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