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나이 서른. 삶의 나이테가 가장 뚜렷한 시기다.

"파니 핑크"는 이 위기의 "서른 고개"를 넘는 노처녀의 사랑찾기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묻는 영화다.

이 작품의 매력은 주인공의 심리변화를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상처받고
소외된 영혼을 어루만지게 하는 묘한 힘에 있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최신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개같은 날의 오후"등 국내여성영화가
소프라노의 외침이라면 이 영화는 콘트라베이스의 음색으로 다가온다.

29살인 파니(마리아 슈라더)는 직장도 있고 집도 있으나 사랑할 남자가
없다.

마인드 콘트롤에 몰두하며 날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공허롭고 외롭기는
마찬가지.

어느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심령술사 오르페오(피에르 사누시
블리스)가 그녀에게 운명의 남자를 예언해준다.

고급옷을 입고 검은 차를 모는 금발의 남자.23이라는 숫자가 징표라는
것이다.

출근길에 운명의 번호판을 단 블랙재규어 자동차를 발견한 그녀는
쾌재를 부르며 그남자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사랑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도움을 청하러 온 그녀에게 오르페오는 정성을 다해 매력적인
여인으로 가꿔주고 주문도 가르쳐준다.

하지만 그녀는 또 사랑에 실패한다.

게이바의 여장가수이기도 한 오르페오 역시 동성애인에게 버림받고
괴로워한다.

서로의 상처를 다독거리며 애틋한 사랑을 꽃피우는 사이 그녀는
서른번째 생일을 맞고 영혼이 소진된 오르페오는 악트러스라는 미지의
별로 사라진다.

다시 혼자가 된 파니.

쓸쓸하게 돌아오던 그녀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웃들을 돌아보게 되고
마침내 셔츠에 23이 새겨진 젊은 화가 라쎄(잉오 나우욕스)를 발견한다.

단절과 부정의 세계에서 화해와 긍정의 세계로 이어지는 인생의
통과제의를 진지하게 담아낸 수작.

( 21일 동숭아트센터 / 27일 힐탑 개봉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