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1,000억달러 시대] 신시장 개척 .. 수출시장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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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든 기업이든 수출전략을 짤 때는 대부분 타깃시장을 먼저 설정한다.
신시장을 개척하든 기존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든 특정지역을
집중 공략하는게 수출물량 확대나 제품이미지 제고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힘"의 집중을 위해서도 타깃시장 설정은 필요하다.
개발도상국의 경우엔 특히 그렇다.
물론 타깃은 수시로 바뀐다.
셰어확대에 중점을 두느냐, 아니면 개척에 포인트를 맞추느냐에 따라
타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제품의 경쟁력과 무역환경이 타깃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한국도 물론 그랬다.
서울보다 조금큰 홍콩을 타깃시장으로 삼았던 적이 있는가 하면 열사의 땅
중동을 목표로 한때도 있었다.
한국의 타깃은 크게 보아 <>해방직후부터 1948년 정부수립시까지의 4년간을
시발로 해 <>"한일무역협정"이 체결되던 50년대 <>시장다변화가 이루어지던
60년대 <>1차 석유파동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70년대 <>2차 석유파동과
중동 특수의 붐이 일었던 78~85년 <>건국이래 최초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던
86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섯차례에 걸쳐 변해왔다.
여명기였던 45~48년중엔 중국 마카오 홍콩등이 주요 타깃이었다.
이 시기는 미군 통제하에서 대외교역이 이루어지던 때.
미군정청은 46년 "대외무역규칙"을 공포하고 군정청의 허가 없이는 대외
무역을 못하도록 했다.
마카오신사라는 말을 유행시킨 마카오무역은 47년 미군정청의 허가로 시작
됐다.
47년 8월부터 홍콩정청이 한국에 수출허가서를 발부함에 따라 마카오무역
시대는 5개월만에 막을 내리고 홍콩무역시대가 열린다.
50년대에는 "한일무역협정"체결을 계기로 주요 수출시장이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일본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일본과의 무역은 주로 사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60년대 들어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되자 수출은 경제성장의 견인차로 그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미국은 일본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타깃시장으로 등장한다.
반대로 홍콩의 비중은 급격히 감소했다.
이는 한국경제가 원조물자를 통해 미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시작하면서
부터 발생한 현상이다.
정부의 수출진흥종합시책이 마련된 것도 이 시기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전반까지는 월남전 특수로 월남이 갑자기 타깃
시장으로 떠올랐다.
월남이 10대 수출대상국에 끼일 정도였다.
70년대는 여러가지 점에서 그전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수출시장 다변화 정책을 폈다는 점에서 그렇다.
타깃도 다양해졌다.
게다가 73년의 오일쇼크는 타깃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왔다.
미국 일본등 주요 시장의 경기가 불황의 터널로 들어선데다 중동산유국들이
엄청난 구매력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1차 석유파동은 74~75년까지 한국경제를 경기침체 인플레 국제수지악화의
삼중고에 시달리게 하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에 대한 수출비중이 감소세로 접어든 것도 이때다.
73년까지만 해도 70.2%에 달하던 미국과 일본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매년
감소돼 76년에는 55.7%로 낮아진다.
반면 EU(유럽연합)와 중동에 대한 수출이 크게 늘어난다.
대EU수출은 66~76년중 연평균 52.0%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수출비중도 7.0%에서 14.9%로 크게 높아졌다.
또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UAE등 대중동 수출은 연평균 87.3%
의 급속한 증가율을 나타내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6년의 0.4%에서
76년에는 7.7%로 대폭 확대된다.
이른바 중동특수가 일어난 것.
1차 석유파동의 여파가 점점 가라앉기 시작하던 77년 한국은 대망의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한다.
이 때는 중동붐이 서서히 진정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등 중동
산유국에 대한 수출비중도 낮아진다.
대신 홍콩 싱가포르등 동남아가 타깃시장으로 부상했다.
동남아국가들이 경제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그에 따른 수입이 크게
늘어난 것.
한국이 건국이래 최초로 31억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면서 흑자시대
를 연 것도 이시기다.
86년 이후 세계경제는 국제 원유가의 급락, 미 달러화의 약세지속, 국제
금리의 하락등 소위 "3저현상"으로 경제여건이 크게 개선됐다.
이에 따라 한국의 수출도 호황기를 맞아 86~88년중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26.1%의 높은 신장률을 나타냄으로써 80년대 들어 최대의 호황기를 누린다.
이 시기에는 타깃시장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선진국에 대한 집중수출로 인한 통상마찰 완화를 위해 시장다변화가 다소
진전됐으나 수출 대상국 1위부터 3위까지는 미국 일본 홍콩으로 변동이
없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 대만 홍콩을 중심으로 한 중화경제권이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자리잡는다.
중화경제권은 이들 3개국가를 포함, 화교들이 경제를 주무르는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등 8개국을 말한다.
80년대를 지나 9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은 수출부진기에 접어들게 된다.
근본적인 요인은 한국 제품의 경쟁력 약화에 있었다.
타개책으로 중남미 북방 아세안등을 집중 공략했으나 미국 일본 EU등
기존 주력시장에서 밀려 전체수출은 부진했다.
현재는 중남미 중동 중국을 묶는 이른바 "3중시장"이 타깃이다.
중남미 각국의 경제개발과 시장개방확대, 이스라엘과 PLO의 평화협정체결로
인한 정세의 안정, 그리고 국제 무역시장의 큰 손으로 등장한 중국의 활발한
구매력에 무역확대 전략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 이건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8일자).
신시장을 개척하든 기존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든 특정지역을
집중 공략하는게 수출물량 확대나 제품이미지 제고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힘"의 집중을 위해서도 타깃시장 설정은 필요하다.
개발도상국의 경우엔 특히 그렇다.
물론 타깃은 수시로 바뀐다.
셰어확대에 중점을 두느냐, 아니면 개척에 포인트를 맞추느냐에 따라
타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제품의 경쟁력과 무역환경이 타깃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한국도 물론 그랬다.
서울보다 조금큰 홍콩을 타깃시장으로 삼았던 적이 있는가 하면 열사의 땅
중동을 목표로 한때도 있었다.
한국의 타깃은 크게 보아 <>해방직후부터 1948년 정부수립시까지의 4년간을
시발로 해 <>"한일무역협정"이 체결되던 50년대 <>시장다변화가 이루어지던
60년대 <>1차 석유파동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70년대 <>2차 석유파동과
중동 특수의 붐이 일었던 78~85년 <>건국이래 최초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던
86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섯차례에 걸쳐 변해왔다.
여명기였던 45~48년중엔 중국 마카오 홍콩등이 주요 타깃이었다.
이 시기는 미군 통제하에서 대외교역이 이루어지던 때.
미군정청은 46년 "대외무역규칙"을 공포하고 군정청의 허가 없이는 대외
무역을 못하도록 했다.
마카오신사라는 말을 유행시킨 마카오무역은 47년 미군정청의 허가로 시작
됐다.
47년 8월부터 홍콩정청이 한국에 수출허가서를 발부함에 따라 마카오무역
시대는 5개월만에 막을 내리고 홍콩무역시대가 열린다.
50년대에는 "한일무역협정"체결을 계기로 주요 수출시장이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일본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일본과의 무역은 주로 사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60년대 들어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되자 수출은 경제성장의 견인차로 그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미국은 일본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타깃시장으로 등장한다.
반대로 홍콩의 비중은 급격히 감소했다.
이는 한국경제가 원조물자를 통해 미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시작하면서
부터 발생한 현상이다.
정부의 수출진흥종합시책이 마련된 것도 이 시기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전반까지는 월남전 특수로 월남이 갑자기 타깃
시장으로 떠올랐다.
월남이 10대 수출대상국에 끼일 정도였다.
70년대는 여러가지 점에서 그전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수출시장 다변화 정책을 폈다는 점에서 그렇다.
타깃도 다양해졌다.
게다가 73년의 오일쇼크는 타깃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왔다.
미국 일본등 주요 시장의 경기가 불황의 터널로 들어선데다 중동산유국들이
엄청난 구매력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1차 석유파동은 74~75년까지 한국경제를 경기침체 인플레 국제수지악화의
삼중고에 시달리게 하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에 대한 수출비중이 감소세로 접어든 것도 이때다.
73년까지만 해도 70.2%에 달하던 미국과 일본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매년
감소돼 76년에는 55.7%로 낮아진다.
반면 EU(유럽연합)와 중동에 대한 수출이 크게 늘어난다.
대EU수출은 66~76년중 연평균 52.0%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수출비중도 7.0%에서 14.9%로 크게 높아졌다.
또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UAE등 대중동 수출은 연평균 87.3%
의 급속한 증가율을 나타내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6년의 0.4%에서
76년에는 7.7%로 대폭 확대된다.
이른바 중동특수가 일어난 것.
1차 석유파동의 여파가 점점 가라앉기 시작하던 77년 한국은 대망의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한다.
이 때는 중동붐이 서서히 진정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등 중동
산유국에 대한 수출비중도 낮아진다.
대신 홍콩 싱가포르등 동남아가 타깃시장으로 부상했다.
동남아국가들이 경제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그에 따른 수입이 크게
늘어난 것.
한국이 건국이래 최초로 31억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면서 흑자시대
를 연 것도 이시기다.
86년 이후 세계경제는 국제 원유가의 급락, 미 달러화의 약세지속, 국제
금리의 하락등 소위 "3저현상"으로 경제여건이 크게 개선됐다.
이에 따라 한국의 수출도 호황기를 맞아 86~88년중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26.1%의 높은 신장률을 나타냄으로써 80년대 들어 최대의 호황기를 누린다.
이 시기에는 타깃시장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선진국에 대한 집중수출로 인한 통상마찰 완화를 위해 시장다변화가 다소
진전됐으나 수출 대상국 1위부터 3위까지는 미국 일본 홍콩으로 변동이
없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 대만 홍콩을 중심으로 한 중화경제권이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자리잡는다.
중화경제권은 이들 3개국가를 포함, 화교들이 경제를 주무르는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등 8개국을 말한다.
80년대를 지나 9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은 수출부진기에 접어들게 된다.
근본적인 요인은 한국 제품의 경쟁력 약화에 있었다.
타개책으로 중남미 북방 아세안등을 집중 공략했으나 미국 일본 EU등
기존 주력시장에서 밀려 전체수출은 부진했다.
현재는 중남미 중동 중국을 묶는 이른바 "3중시장"이 타깃이다.
중남미 각국의 경제개발과 시장개방확대, 이스라엘과 PLO의 평화협정체결로
인한 정세의 안정, 그리고 국제 무역시장의 큰 손으로 등장한 중국의 활발한
구매력에 무역확대 전략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 이건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