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는 100억달러를 수출해야 해".

지난 73년 12월 3일 개각직후 청와대에서 열린 박정희대통령 주재 신임
각료들과의 다과회.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건설부장관에서 상공부장관으로 옮겨앉은 장예준
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해 수출실적이 32억2,500만달러였으니 3배이상의 수출을 달성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장장관으로선 취임 첫날부터 어깨가 무거워졌을 수 밖에.

그러나 그는 100억달러 수출을 당초 목표연도인 79년보다 2년이나 앞당겨
77년에 달성했다.

결국 박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수출 1,000억달러의 위업을 이루기까지 피와 땀을 흘린 사람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기업들이 수출전선에서 뛸 수 있도록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어준 정부의 역할은 과소평가될수 없다.

정부내에서도 수출 주무부처인 상공부(현통상산업부)의 역할은 전쟁터의
지휘본부 바로 그것이었다.

목표를 설정하고 기업들을 독려하는 수출드라이브시대의 상공관료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수출입국"의 선봉이었다.

정부쪽 주역의 1번타자는 64년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한 박충훈장관.

박장관은 63년2월부터 8월까지와 64년5월부터 67년10월까지 상공장관을
두번 역임해 "수출장관"이란 별명까지 얻은 인물.

"자나깨나 수출에만 골몰했다. 틈틈히 수출할 물건이 뭐 있을까, 저물건을
어떻게 하면 수출할까"등으로 재임기간 내내 노심초사했다는게 그의 회고다.

박장관은 특히 60년대 초반 경제정책의 방향을 "수입대체"에서 "수출우선"
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당시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개발도상국의 초기경제정책
방향중 두갈래인 "수입대체산업육성"과 "수출우선 정책"을 놓고 논란이
심했던 때다.

"수출우선론자"인 그는 서슬퍼런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직접
설득했고 64년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정할때는 수출주도형 공업화로 경제
개발 전략을 굳히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수출드라이브에 시동이 걸린후 70년대초 "수출 제1주의"라는 캐치프레이즈
로 "가편" 한 주인공은 이락선장관(69.10~73.12).

이장관은 취임직후 대통령 연두순시에 보고할 상공시책을 수립하는 과정
에서 직접 "수출제1주의"라는 제목 아이디어를 냈다.

특히 70년초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발표하면서 전국에 배포한 시책자료 표지
엔 10억달러에 해당하는 3,000억원을 강조해 "삼천만이 합심하여 삼천억원
수출하자"는 구호를 써넣어 "삼천억 장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장관과 라인을 이룬 심의환상역차관보와 정민길상역국장도 10억달러
수출의 공을 나눠 가질만한 사람들이다.

상공부의 역대 수출장관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로는 장예준장관
(73.12~77.12)을 들수 있다.

재임기간중인 77년 수출 100억달러 달성은 한국경제의 성공을 확인시켜
주는 상징이었을 만큼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해서이다.

사실 장장관이 취임했던 73년말은 1차 오일쇼크가 세계경제를 뒤흔든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그만큼 힘든 여건을 짊어지고도 재임기간 4년동안 오로지 "수출
100억달러"를 향해 뛰었다.

수출전선의 "첨병"인 종합상사 제도를 도입한 것도 장장관이다.

그는 취임후 1년간 17개국을 방문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장장관은 그러나 정작 100억달러 돌파기념 행사엔 참석하지 못하는 "비운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당시 행사일을 이틀앞둔 12월20일 상공부의 자원부문이 동력자원부로 분리
되면서 동자부장관에 내정된 것.

그래서 이날 행사는 신임 최각규장관이 주관했고 장장관은 신설부처에
정식으로 취임하지 않아 식전엔 초대되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흘린 땀의 결실이랄 수 있는 100억달러 수출기념 행사
광경을 TV실황중계로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대 상공부장관중 "최고의 행운아"는 제32대 나웅배상공장관을 꼽을만
하다.

재임기간(86.8.27~88.2.25)중 건국이래 최초의 무역흑자를 달성해 "흑자
장관"의 타이틀을 달아서다.

나장관은 동시에 한미통상찰해소를 위해 수출을 독려하기보다는 적절히
"조절"해야 하는등 선배장관들과는 대조적인 역할을 맡았었다.

어쨌든 수출드라이브의 관성은 지속돼 88년11월14일 500억달러를 돌파했고
이후에도 수출은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500억달러 고지를 넘을 당시 상공장관은 안병화씨였으며 이때 실무주역은
김철수차관보와 신국환상역국장이었다.

이중 신국장은 84년2월부터 88년말까지 5년간 재임해 최장수 상역국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관료중 최고의 통상협상전문가로 불리는 김철수씨는 93년2월 상공장관
에 취임해 세계무역 환경을 뒤바꿔 놓을 우루과이라운드(UR)타결을 지켜봤고
현재는 세계무역기구(WTO) 초대 사무차장직을 맡아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차병석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