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봉 이래광(1563~1628)은 선조때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광해군때의
정치적 갈등, 인조때의 이괄난과 정묘호란을 겪는등 어려운 시대를
살았었는데도 당장에 휩쓸리지 않고 언제나 성실하고 양식있는 관료이자
학자로서의 자세를 굳게 지켰던 인물이다.

당시 병근판서였던 이희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0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23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한뒤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
했다.

그뒤 선조때는 병조화랑 성균관대사성 홍문관부제학 안변부사 홍주목사,
광해군때는 순천부사, 인조때는 도숭지 홍문관제학 사간원대사간 이조참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을 잇달아 지내면서 세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징되었다.

그는 한마디로 국가적 정치적 대혼란의 와중에서도 공평무사함과 청렴성
그리고 성실성을 오로지 지킨 조선조 관료사회의 지행일치의 귀감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중요한 면모는 학자로서의 구실에 있었다.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천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적 전개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실학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명나라에 사신을 왕래하면서 당시 그곳에 와있던
이탈리아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문실전"와 "중우편", 중국인 유흥과
심린기의 공저 "속이담"을 가지고 돌아와 "지봉류설"이라는 책을 지어
한국에 처음으로 서양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을 개화시켰던 것이다.

그의 사상은 1625년 인도에게 올린 12개조목의 시무책(조진무실차자)에
잘나타나 있다.

정치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 지는 것은 모두가 부실한
병때문이다.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직에 있고 서은 곧 실이다.

신심으로 실정을 행하고 실공으로 실효를 거두어야 한다.

생각마다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무실이다.

그가 주창한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실성과 더불어 도덕적 성실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요즘 노전대통령의 비자금 파문으로 온 국민이 정치지도자들의 성실성과
도덕성 결여를 통탄해 마지 않으면서 엄청난 절망감에 빠져있다.

때마침 문화인물로 선정된 지봉 이수광의 달이 되었다.

370년전 그가 주창한 무실론에 귀를 기울이는 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일자).